이상형을 물어볼 때 '배려심이 많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답을 하면 '아, 착한 사람 좋아하시나 봐요.'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이 말을 들으면 김이 픽 빠진다. 배려는 단순히 착한 사람, 친절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히키코모리 찐 내향인시절, 나는 관계의 속도가 느려 깊은 관계가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서로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상호적인 교류 없이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를 거부감이 발동하여 선을 긋곤 했다.
반면에 누군가는 사람을 보면 호기심이 샘솟아 이것저것 캐묻기를 좋아했다. 그게 그 사람 나름대로 관심표현 방법이며 '초면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상대방을 위한 나름대로 배려'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오히려 상대방을 '예의 없고 배려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가 진심으로 나와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나를 관찰하여 나의 속도를 인지했을 터이고, 자신과 속도가 다르다면 나의 속도에 맞추어 시간을 들이는 배려를 하지 않았을까.
그의 관심은 나를 향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호기심과 욕심이었다.
우리는 다 나름대로 배려를 하고 산다. 하지만 '나름대로 배려'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배려가 되어 자기가 배려를 하고 있다는 합리화를 통해 상대방을 상처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너를 향한 관심의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에 심취하여 자신을 향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도 하며 '네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조언'이라는 가면으로 서슴없이 하는 비난과 비판 뒤엔 상대방을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가스라이팅이 숨어있다. '나름대로 배려'에서 마음의 화살표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다. 이렇게 우리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상처를 주고 산다.
배려의 사전적 정의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인데 여기서 배려는 수동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정의한 배려는 '상대방에게 내가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함'으로 이 마음이 배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
나 또한 배려라는 이름으로 많은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용기를 헤아리는 마음보다 '관계가 깊어졌다가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