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누구나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여름의 <작은 빛을 따라서>는 정읍에 사는 오 씨네 필성슈퍼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은 IMF직전인 199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필성슈퍼는 오 씨 집안 여섯 식구의 밥줄이자 두 딸들의 미래가 걸린 최후의 보루이자 안식처다. 하지만 1996년이라는 시간은 가족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다가올 재앙에 가깝다.
가족들이 모두 합심해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필성슈퍼는 엉터리 마트와 쌤마트의 출현으로 위기감과 긴장감이 돈다. 게다가 이 시기는 금융개방과 함께 월등한 자본력과 영업력을 지닌 대형 유통회사들이 마을 상권을 하나씩 잠식하던 시기였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필성슈퍼의 주인인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노동을 하면 할수록 이윤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가장의 모습에서 시대적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자영업자의 상황은 2024년인 현재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선 그림
그 틈새를 메우는 것은 엄마와 두 딸 그리고 할머니다. 엄마는 곧 “두부 한 모라도 배달”, “배추 한 포기라도 절여드림” 이란 문구를 붙이며 난국을 타계하려고 하고 소설의 화자인 은동과 언니 은세도 배달일을 도맡아 한다. 할머니는 안 팔려서 먼지 묻은 상품들을 늘 반들거리게 닦는다. 필성슈퍼는 이제 가족을 가족으로 통합하고 유지할 수 있는 친밀성으로 대표된다. 변화하는 사회가 달라진 가족의 의미와 역할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 가족은 필성슈퍼를 중심으로 전통적 가족 형태와 미덕을 유지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담이다. 시대의 틈새에 끼어 허우적대는 아버지를 위해 나머지 가족들이 슈퍼를 지키느라 내면이 조금씩 단단해지는 ‘성장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 가장 크게 성장하는 인물은 역설적으로 할머니다. 할머니는 인생에서 단 한 번의 풍요로운 시기를 거친 적도 없고 문맹이라 어쩌면 가장 무력감에 빠져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손녀에게 글을 배우며 세상 밖으로 나가고 소설 속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농장 ‘타라’를 지키기 위해 성장하는 캐릭터라면 오 씨네 여자들에게는 '필성 슈퍼’가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더 이상 ‘슈퍼’도 ‘마트’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은 이제 대형마트조차 안 가고 배달앱으로 식료품을 주문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서민들의 최후의 보루와 같은 자영업 역시 설 곳이 사라지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김미경 작가의 구멍가게 연작
한때 시골 구멍가게를 따뜻한 색감으로 그린 김미경 작가의 펜화 작품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작가는 시골 마을에서 길을 잃고 어둑어둑한 초저녁 하늘 아래 조용히 앉아있는 구멍가게의 희미한 불빛에 이끌려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작은 빛을 찾아서>의 필성슈퍼도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작은 불빛 같은 위로와 처연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비록 현시점에서 필성슈퍼 역시 사라졌을 것이고 그 많던 가게는 박제된 이미지로 남았지만.
정보가 지식이 되고 재빠르게 시류에 적응하는 능력이 지혜를 가장하는 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다. 권여름의 <작은 빛을 찾아서>는 사라져 가는 작은 빛들의 잔상을 조명한 가치 있고 이채로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