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도둑맞은 가난>(1975)

가난의 위장전입

by 이선
사진 : 이선


1. 가난, 그 경멸의 향기

톨스토이가 말했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고.

가난도 그런 것 같다. 부자들은 비슷비슷한 재테크의 경로를 통해 부를 영유한다. 가난한 이들은 저마다 다른 ‘곡절’에서 말미암은 다양한 ‘결’의 가난을 체험한다. 그럼에도 부와 달리 가난은 쉽게 확정 짓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부의 기준이 다른 것처럼 저마다의 가난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적 빈곤 시절,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가난은 탐욕스럽지 않으면서 안빈낙도하는 나의 올곧은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지표였다.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1975)은 국민 대다수가 가난했던 시절에 쓰인 작품이다. 소설 배경이 되는 곳은 요즘의 ‘쪽방촌’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소설 속 열악한 주거 환경을 오감 중 후각을 내세워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늘 연탄가스와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고 “매캐하고 짜고 고리타분하고 시척지근한 냄새”는 “방에도 옷에도 이부자리에도 배어”있었고 “내 몸에서도 이 냄새가”난다. 작가의 표현처럼 가난의 풍경은 시각보다 후각으로 먼저 덮쳐올 것 같다.

화자인 ‘나’는 비록 환기가 안 되는 쪽방촌에 살지만 그 냄새를 증오한 적이 없다. 나만 두고 죽어버린 가족들이 그토록 “치를 떨고 경멸하던” 가난의 냄새를 나는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난은 나의 ‘소명’이니까.


2. 가난의 두 이름, 소명 혹은 굴욕

‘나’에게는 상훈이란 남자가 있다. 동거인이다. 서로 비슷한 처지일 거라고 단정 지었고 그렇게 해서 그를 내 둥지에 받아들였다. 사실 두 사람은 기울어진 운동장 대척점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 번 떨어지면 나락으로 가는 비탈 끝에서, 상훈은 펜트하우스 같은 저 높고 안전한 곳에서. 두 사람의 계급 격차 혹은 “구별 짓기”는 밥상에 놓인 멸치부터 시작해 일상 곳곳에서 불협화음을 이룬다. 아슬아슬한 동거 생활이 지속될수록 ‘나’는 상훈에게 이질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다.

사진 : 이선

그러던 어느 날 상훈은 당당했던 ‘나’의 가난에 균열을 낸다. 나와 같은 계급에 속한 줄 알았던 상훈은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가난 체험’ 위해 내 삶에 ‘위장전입’ 한 것이다. 상훈의 태도는 기망과 위선이다. 알고 보면 그가 ‘나’에게 보인 기망과 위선은 악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재력 있는 아버지에게 ‘착한 아들’ 인증을 받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보인 그의 언행은 일거수일투족 기름져 있다. 기름진 삶의 태도는 가난을 모른다. 가난을 모르니 주어와 술어는 늘 미끄러지기 일쑤다. 삶이란 본래 헐거움과 결핍의 연속이 아닌가. 그는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나’로 하여금 부끄러운 것이라며 일장훈계를 남기고 떠났다. 그는 ‘나’의 가난을 도둑질해 간 대신 그 자리에 슬그머니 굴욕감을 심어 놓고 갔다.

그 결과 ‘나’는 이제 내가 속한 세계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수 없다. 후각으로만 다가왔던 가난은 어느새 시각으로 확장된다. “빗발로 얼룩진 채 한쪽이 축 처진 반닫이,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난 더러운 벽지, 자꾸(지퍼)가 고장 난 비닐 트렁크… 우그러진 양은 냄비와 양은 식기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초라한 사물들은 오롯이 나로 환유 되며 모멸감을 안겨준다.


3. 빈곤의 상상력, 상상력의 빈곤

가난은 본래 물질적 빈곤을 뜻하지만 필자인 ‘나’는 그것을 정신적 허기로 받아들인다.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부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정신적으로 곤궁하다. 허기가 위장 아닌 심장을 가득 채울 때 그들은 결국 가난을 헌팅하러 다닌다.

‘가난 도둑질’은 소설이 쓰인 1970년대에도 그렇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TV예능프로를 통해, SNS를 통해 이른바 ‘셀럽’이란 이름의 가진 자들이 ‘궁상’, ‘짠내’ 컨셉을 내세워 가난 코스프레 하는 장면을 우리는 쉽게 목격한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 가난을 이용해 쉽게 돈과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들러붙는다. 타인의 내밀한 영역인 가난을 침범하는 일은 그 소유자에게 외상을 안겨줄 수 있어서 외설적이다.

박완서 작가는 ‘가난한 삶, 가난한 사람이란 이런 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가난의 원인이 다양한 것처럼 가난한 자들의 얼굴도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 고통받는 얼굴”도 천의 얼굴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라고 해답도 주지 않는다.

다만 당부할 뿐이다. 누군가의 가난을 셀링포인트로 삼아 빈곤한 상상력으로 ‘가난은 이런 것’이라고 규정짓거나 꼬리표 붙이지 말라고. 가난에 대한 연민은 오롯이 가난을 이겨낸 사람들 몫으로 남기라고. 타인에게 훔칠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이자 가장 어려운 것, 그것이 바로 가난이란 걸 그들은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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