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박정희가 추방한 1세대 건축가

미술관이 된 옛 건물 16

by 이선


김중업건축박물관 정면

아주 오래전 서울 모 대학 건축학과에 다니고 있던 사촌동생에게 “건축학도들이 최고로 치는 한국 근현대 건축물이 뭐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동생은 “김중업이 지은 프랑스대사관을 최고의 건축물로 친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건축가 김중업에 대해 처음 들은 기억이 난다.

김중업건축박물관 측면과 김중업 기념비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은 비슷한 시기 활약했던 김수근과 쌍벽을 이룬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다. 대표작으로 주한 프랑스대사관, 삼일빌딩, 서산부인과,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등이 있다. 건축가는 하늘의 별이 된 지 오래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박물관이 경기도 안양에 있다.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안양은 서울의 위성도시에 속한다. 과거에는 공업단지였으나 땅값이 상승하면서 대다수의 공장들이 이전하면서 최근에는 4차 산업을 바탕으로 하는 스마트 시티로 변신했고 평촌신도시를 중심으로 경기도 내 학원 밀집도 1위를 보유한 학구열 높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가 지은 안양사 터에 지은 구 유유산업 건물들.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안양(安養)이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안양(安養)은 마음은 편안하게 지니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한양을 향하는 9대 간선로 중 하나였다. 경부선이 개설되면서 밭과 논이었던 곳에 철도가 놓이면서 1905년에 안양이 시작되었다. 철도를 중심으로 공장과 주거가 건립되면서 안양역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안양사가 있던 곳이 현재 안양 예술공원이고 그곳 입구에 제약회사 (주)유유산업이 건물이 남아있다. 1959년 지어진 이래 50 년간 공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중 연구동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2014년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공장동은 안양박물관으로 쓰인다.

김중업박물관에서 바라 본 안양박물관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왜 그와 연고가 없어 보이는 안양에 김중업을 기리는 건축박물관이 들어섰을까? 사무동과 공장동, 수위실이 김중업이 설계한 것으로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구 유유산업 정문과 수위실 모습

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들머리에 서면 유유산업 이니셜인 Y자 형상의 철문과 원형 수위실이 눈에 띈다. 수위실 건물은 요즘 보기 드물게 조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인상 깊다. 사방을 한눈에 조명할 수 있게 설계된 원형의 공간은 건축가의 인간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관이 잘 반영된 건물처럼 보인다. 특히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갑질이나 경비실의 열악한 환경을 나몰라라 하는 요즘 세태를 떠올리면 말이다.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건축박물관이자 공립박물관인데 그의 큰아들(김희조)이 기증한 모형, 사진, 스케치 등 다양한 건축 자료를 기증받아 소장, 전시 중이다. 정문에서 볼 수 있던 Y자의 캐노피 기둥과 돌출된 기둥열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1952년 르 코르뷔지에와의 만남을 계기로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도 찬디가르 주정부청사 건물

1941년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서울대 건축학과 조교수를 역임하던 김중업은 잘 나가던 시절 한국전쟁을 맞는다. 한반도에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베니스 ‘국제예술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중업은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 자신을 소개하며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의 열정에 감복하여 당시 자신이 진행하던 인도 찬디가르 주정부 청사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 이때 김중업은 옥상정원 제안서가 받아들여져 3년간 르 코르뷔지에 밑에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김중업이 설계한 제주대학건물과 부산대, 건대 건물들

귀국 후 김중업은 1956년 종로구 관훈동에 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으로 국내 주요 건축물 설계를 도맡아 하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김중업은 소설 <9켤레 구두로 남은 사나이>의 배경이 된 광주대단지 사건과 와우아파트 붕괴 등 박정희 정권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비판하다 군사정권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감중업이 설계한 삼일빌딩과 서산부인과 그리고 유유산업 건물들

당시 우리나라 초고층 건물로 설계했던 삼일 빌딩의 설계비도 못 받고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받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강제추방 되었다. 그는 망명객으로 7년 동안 프랑스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박정희가 죽기 1년 전에 귀국했다. 이런 그를 박정희 시대의 ‘원조 블랙리스트 인사’라고 한다.

대표작인 프랑스 대사관과196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공로훈장

독재정권과의 불화 때문에 국내에서 기량을 맘껏 펼치지는 못했지만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익힌 서구 근대건축과 한국 전통건축의 조형언어를 재해석한 그의 건축물을 전국 곳곳에 남아있다. 그중 전통건축의 목구조와 지붕선을 추상화시킨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은 독창성을 인정받아 196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을 받았다.

건축재료도 노출콘크리트, 벽돌, 유리, 프리캐스트(PC) 패널 등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했다. 프랑스 대사관에도 이용된 이 PC패널은 유유산업 공장에도 사용되었고 유리와 함께 김중업 건축에 자주 등장하는 건축 재료이다.

김중업의 드로잉과 당대 예술인들과의 교류의 흔적

전시장 곳곳에 김중업이 직접 그린 스케치와 건축 도면에서 한국 전통예술의 선과 멋을 볼 수 있다. 작가의 손맛이 살아있는 뛰어난 드로잉들은 웬만한 화가들 뺨치는 실력이다.

원래 김중업은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건축을 선택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미술과 시와 가장 가가운 것이 건축”이었기 때문에 건축가가 되었다고 언급하며 늘 ‘건축가는 예술가’라고 강조했다.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이어진 김중업의 이러한 건축 철학은 우리나라 현대 건축에 DNA처럼 새겨졌다.

김중업의 유작이 된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는 김중업의 건축유산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기획전과 강좌 및 문화프로그램을 선 보이고 있다. 옥외 공간에는 안양시의 지명유래가 된 고려 태조가 세운 안양사의 지층 및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정문 앞에서 보물 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164호인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관람객을 맞아준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산업 공장동을 리모델링한 안양박물관 옥상에서 본 안양사 유적 발굴현장과 박물관 내부. 옥탑과 1층에 레스토랑과 까페가 있다.

안양사 터에서 나온 유물들은 김중업건축박물관 바로 옆인 안양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천 년의 문화유적과 근대 문화유산이 시간의 켜를 두고 중첩된 곳이라 당일치기 여행으로 추천하고픈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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