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노인력>과 영화 <퍼펙트 데이즈>

망설이지 않고 노년을 즐겁게 받아들일 결심

by 이선


우리 주변에는 끝에 ~력이라고 붙은 합성어가 많다. 어휘력, 독서력, 사고력 등 주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단어에 힘 력(力) 자가 붙으면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낸다. 하지만 여기에 노인+힘(力)이 조합된 합성어가 있다면? 대척점에 놓인 두 단어가 결합하면 뭔가 불협화음을 낼 것 같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들린다. ‘노인장’이란 말은 익숙한데 ‘노인력’은 대체 뭘까?


노인력은 1990년대 말 일본의 현대미술가이자 소설가인 아카세가와 겐페이(1937-2014)가 고안한 단어다. 30년도 훨씬 전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시대를 맞이한 일본 사회를 강타한 신조어였다. 1937년생인 작가는 한때 전위미술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하다 1981년에는 단편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받기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누구보다도 뜨겁게 청춘을 불사른 작가도 60세에 접어들자 노년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한 끝에 나온 단어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그동안 부정적이고 우울하게만 여겼던 노년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인식하기 위해 ‘노인력’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 같다. 결코 반갑지 않지만 극진히 대접해 보내야 할 진상손님과도 같은 건망증, 노망(치매)을 인생의 장점으로 생각한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노인력이란 별게 아니다. 나이를 초월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구 한 귀퉁이에서 소소하고 조용하게 삶을 즐기다 가는 요령이다. 한마디로 무언가를 더하는 게 아닌 빼기를 하면서 너무 애쓰지 않고 남은 인생 대충 살다가자로 읽혔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다 보니 영화 속 한 인물이 떠올랐다.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였다.

21세기 도쿄에 사는 히라야마는 철저히 아날로그형 인물이다. 생활에 기본이 되는 물건만 빼고 그가 사는 공간은 심플하기 그지없다. 다다미방을 채우는 것 중 사치스러운 건 수많은 책들과 카세트테이프들뿐이다. 골동품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이용해 카세트테이프로만 음악을 듣는다. 이러한 그의 골동취미는 MZ세대에게 흥미를 불어 일으킨다. 히라야마가 지닌 카세트테이프의 가치를 알아본 레트로샵 주인은 거래를 제안하기도 한다. 저자도 90년대 일본 청춘들이 골동품과 레트로에 심취하는 게 신기하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라이카 카메라로 일상을 기록하는 취미를 지녔다. 각 챕터마다 나오는 저자가 찍은 재치 있는 거리 풍경들은 독자들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히라야마도 매일 올림푸스 필카로 코모레비(햇빛에 반사되는 나뭇잎)를 찍는다. 인화지에 현상한 사진들을 집에 가져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찢어버리고 괜찮은 것만 양철박스에 차곡차곡 챙겨 넣는다. 그 모습은 마치 도공이 가마에서 갓 꺼낸 도자기 중 맘에 안 드는 건 과감히 부수고 좋은 것만 챙기는 숭고한 의식처럼 보인다.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무심코 스치는 풍경들을 허투루 보지 않고 순간을 포착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야말로 노인력의 최고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히라야마는 대도시 한복판에 살면서도 일종의 시골생활을 즐긴다. 일터에서 채집한 작은 묘목들을 거두어 미니화분에 심은 후 방안에 작은 온실을 만들었다. 저자는 “도시 안에서 시골생활을 하는 것”도 노인력에 포함시켰는데 히라야마도 여기에 속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 대도시 오래된 동네 주택가에 가보면 저자가 말한 노인력을 단번에 이해할 것 같다. 가지런하게 분류되어 차곡차곡 쌓여있는 폐지, 대야나 스티로폼 박스에 할머니들이 심어놓은 고추나 가지, 호박 등.


국경을 넘어 노인력은 이제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될 것 같다. 그것은 태극기부대에 동원된 노인들에게는 결코 볼 수 없는 긍정적이고 우아한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생산성에서 한참 벗어나지만 “넘어져도 그냥은 일어나지 않는 힘”이자 “천천히 무언가 양손에 한가득 쥐고 일어나는 힘”이야말로 노인력이 아닐까? 노인력은 3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고령화 시대 한국인 독자에게 전달된 저자의 위로 편지와도 같은 책이다. 슬퍼하고 시간을 거스르기보다는 당당하고 유쾌하게 노년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라고.


*출판사의 도서를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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