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갤러리에서 미국추상미술 엿보기

케네스 놀랜드+샘 길리언

by 이선

신년 들어 처음으로 한남동 페이스 갤러리에 들렀다. 작년에 반응이 뜨거웠던 마크 로스코 전시 본 이후 처음이었다.

페이스갤러리는 미국 뉴욕에 본점을 둔 세계적인 갤러리다. 주로 미국 동시대미술과 모던 아트를 선 보이는 곳인데 1960년 설립됐으니 제법 역사가 긴 갤러리다. 2017년 개관한 서울 외에도 런던, 홍콩, 제네바 등 전 세계에 분점을 두고 있다.

K팝의 약진을 위시로 K컬처의 부흥기를 맞아 해외 갤러리들이 서울 곳곳에 분점을 오픈하는 등 서울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중요한 곳이 된 것 같다. 페이스 갤러리의 서울 진출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새해 첫 전시는 미국 추상회화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가로 꼽히는 미국 작가 샘 길리엄과 케네스 놀란의 합동전이었다.

오늘날 세계 1위 미술시장인 미국, 그 중심인 뉴욕이 파리를 제치고 현대미술의 메카가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였다. 유럽 예술인들이 전화를 피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다다,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던 유럽 전위 작가들이 미국에 정착해 미국미술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모더니즘 미술이 자리 잡았다.

종전 후 미국 미술은 "무엇이 미국 미술인가"를 고민하며 미국미술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이때 미국이 내세울 수 있던 세계적인 작가로는 액션 페인팅을 선보인 잭슨 폴록이었다. 폴록이라는 슈퍼스타를 발견한 미국은 이제 프랑스로 대변되는 유럽 미술의 그늘에서 벗어나 미국 미술의 에너지를 느꼈다. 잭슨 폴록 외에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화가들이 1940년대 이후 미국의 화단을 주름잡았다. 이들 덕에 미술사에서 본격적인 미국작가들의 화양연화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미국 추상미술은 추상표현주의라는 단일 대오로 묶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개별 작가들이 자신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실험적인 제스처를 캔버스 위에 다양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폴록처럼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물감을 드리핑하는 액션 페인팅부터 바넷 뉴먼처럼 커다란 캔버스를 색면으로 채워 회화에 초월적인 정신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번 페이스 갤러리 전시를 통해 선보인 샘 길리엄과 케네스 놀랜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0년대 전후에 등장해 비교적 근래에 작고하기까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상미술을 선보인 작가들이다. 전시는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졌는데 일단 3층 샘 길리엄 작품부터 시작했다.

샘 길리엄은 백인들 일색이었던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단에서 보기 드문 아프리칸 아메리칸계 미국 작가다. 1933년에 태어나 2022년 작고했는데 죽기 1년 전인 2021년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전시를 열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드레이프 회화를 몇 점 선보였는데 2D 캔버스를 벗어나 캔버스를 천정에 매달아 소프트 조각처럼 연출했다. 재즈의 즉흥 정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종이에 연출한 추상적인 회화 시리즈도 대거 선보였다. 종이 표면을 여러 방식으로 변형해 수채화 물감이 서로 스며들며 새로운 색감과 형태를 연출하는 실험적인 작품들이다. 멀리서 봤을 땐 천에 염색을 한 줄 알았다.

샘 길리엄의 작품을 보고 한층 내려와 2층에서 케네스 놀랜드의 작품을 감상했다. 케네스 놀랜드는 1924년생인데 2010년에 작고한 화가다.

케네스 놀랜드의 작품에선 기하학적 도형과 선명한 윤곽을 강조하는 바넷 뉴먼을 떠올렸다.

작가는 2010년 타계하기까지 초기 <서클> 연작을 시작해 사이아몬드, 수평선, 격자무늬 그리고 Shaped Canvas 등으로 확장하여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넓고 깊은 색면을 선택한 케네스는 화가의 손맛을 제거하고 넓고 평평한 하드 엣지를 선호한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처럼 보였다.

사각형의 캔버스를 탈피해 다양한 변형 캔버스 시리즈도 선보이는 등 시기에 따라 여러 양식적 실험과 변화를 선 보였다.

2000년대 이후엔 하드 엣지에서 벗어나 연하고 투명한 색채 표현을 시도했다. 타계 전까지 꾸준히 색채와 형태에 대한 실험을 하며 한계를 벗어나려고 한 것 같다.

특히 1층에서 본 가로 4미터 세로 1미터 넘는 대형 가로줄무늬의 <인디언 조이>(1969)가 인상적이었다.

미국 서부의 광활한 사막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부드러운 번짐 효과를 선에 그대로 남겨 색채가 미묘하게 겹치고 엮임을 보여준다.

사진 이미지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멀리서 보면 확연하게 분리된 듯한 4개의 면들은 가까이 보면 서서히 색채를 달리하고 오른쪽 끝에서 색의 차이를 보이며 희미하게 사라지는 느낌이다.

작가는 V자 형태의 하드 엣지 양식의 대형 작품 시리즈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 단 한 점 나온 작품이 무척 좋았다.

가까이 보면 붓질 흔적을 남긴 거대한 캔버스는 춤추는 듯한 리듬감과 자유로운 손맛을 남긴다.

편의상 3층부터 1층까지 내려오는 관람 동선을 선택했는데 잘한 것 같다. 두 작가의 작품을 보면 팝 아트가 몰려오기 전 미국 미술의 전성기를 가져다준 추상미술의 다채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3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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