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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Oct 02. 2017

나의 콘서트 역사 돌아보기 -2-

지금 생각하니 잘 갔던, 그래서 다행인 공연들

1편에서 이어집니다.


2006년 내한공연에서 한국에 홀딱 반해버렸다는 오아시스(Oasis). 그들이 2009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내 인생 첫 체조경기장 방문이었는데,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오아시스 인기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5개월 뒤에 해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중학교 3학년에 갓 들어선 나는 또래 중 단연 드문 케이스였다. 혼자서 8만 8천원을 내고 콘서트를 가는 건 물론이요, 그 대상은 해외 뮤지션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콘서트는 당연히 혼자 가는 건 줄 알았다. 그 여파인지 지금도 콘서트는 혼자가 더욱 즐겁고, 집중하기 편하다.


그 시기 콘서트 시장이 좀 재밌었는데, 3월 21~22일이 엑스재팬(X JAPAN), 3월 28일이 원더걸스 그리고 4월 1일이 오아시스였다. 당시 엑스재팬은 무시무시한 화장의 강시 락밴드로 기억에 남아있어 패스했고, 그렇기에 둘을 남겼는데 선미 덕후인 나라도 오아시스 공연의 가치가 더욱 큰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매번 6개월치 용돈을 가불 받는 그지 중학생 신분에 따라 오아시스 공연을 가기로 결정. 참고로 그 때 락덕이었던 또 다른 친구는 자기 엑스재팬 보러 간다며 자랑했다.


(그리고 3월, 엑스재팬 내한공연은 여느 때처럼 취소 되었다. 처절하게 절규하며 요시키한테 쌍욕을 퍼붓던 친구의 모습은 안타까움 그 자체)


지금 신분이라면 좀 더 신경을 써서라도 세 개 다 예매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보러 간 오아시스는 생각만큼 화려한 퍼포먼스를 안겨주지 못 했다. 보컬 리암 갤러거의 목소리가, 상했다 상했다 말만 들었지 그렇게 상했을 줄은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Don't Look Back in Anger' 또한 풀셋이 아닌 어쿠스틱으로 연주해 힘이 빠졌다. 노엘이 'Live Forever' 떼창을 듣고 특별히 그 곡을 연주해 준 감격적인 순간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 때의 나는 라빈처럼 "이번 공연도 실망스러웠다"고 일기에 적었을 테다.


해체한 팀의 과거는 더욱 아름답게 꾸며지고 환상으로 점철 된다. 오아시스는 반년도 지나지 않아 역대급 형제의 난을 일으키고 해체했다. 평소처럼 곧 돌아오겠거니 여긴 노엘은 돌아오지 않았고, 오아시스 밖에 모른다던 리암은 비디 아이(Beady Eye)를 꾸려 형으로부터 독립했다. 오아시스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마침내 내 친구들도 오아시스를 듣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나 오아시스 공연 갔다"고 말하면,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좋겠다"를 연발하기 일쑤였다. 이런 식으로 공연이 무게를 찾을 줄은 몰랐으나, 어쨌든 오아시스 내한공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희소성과 가치를 더하고 있다. 졸지에 자랑거리가 되어버린 오아시스 콘서트는, 그렇게 내게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


5개월 뒤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아시스처럼 훗날 가치를 더한 라이브가 하나 더 있다. 2015년 안산밸리록페스티벌의 모터헤드(Motörhead)가 그 주인공이다. 모터헤드의 역사는 해체보다 비극적으로 맺음 되었고, 나는 이제 고인이 된 레미 킬미스터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라이브의 순간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학 도중 휴학계를 제출하고 한국에서 푹 쉬던 2015년, 나는 라인업에 상관없이 락페스티벌을 가보고자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푸 파이터스가 헤드라이너에 오르고, 그 밑에 모터헤드가 떠오르자 나보다 내 락덕 친구가 더욱 환호했다. 그 때까지 모터헤드의 존재를 잘 모르던 나는 락페를 위해 그들의 노래를 예습했다.


모터헤드 공연은 분명 좋았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보여주며 적당한 슬램과 월오브데스, 그리고 모슁 등 다양한 관객군상을 유도했다. 밴드의 알파요 오메가인 레미의 보컬이 너무 힘 없던 걸 감안해도 훌륭한 공연이었다. 단, 그 날 내 바로 뒤에서 터진 경호원의 장기하(+관객) 폭행사건, 그리고 푸 파이터스의 미친 무대가 그들을 뒷전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간혹 전에 다운 받은 모터헤드 노래를 들으면서도 별 생각이 없던 나는, 그 해 12월 레미의 사망소식을 접한 뒤에야 공연을 다시 떠올리고 추억할 수 있었다. 레미의 힘 없는 목소리는 나이의 흐름으로 아쉬워 할 게 아니었고, 되려 흐름을 거스르는 열정으로 찬양 할 것이었다. 이 때를 계기로, 나는 "갈 수 있는 공연은 무조건 가야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 때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지 몰랐다


그 외에도 다시는 보지 못 할 것 같아 보길 잘한 뮤지션을 꼽는다면, 단연 빌리 조엘(Billy Joel)일 것이다. 2007년 한국을 찾은 빌리 조엘은, 그 이후로 미국에 짱박혀 다른 대륙은 돌아다닐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연세도 있으셔서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진 않으니, 역시 이 공연을 간 건 내게 찾아온 행운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나는 2008년을 기점으로 내 콘서트 역사가 시작 됐다고 당당히 이야기 한다. 그래서 빌리 조엘 콘서트는 더욱 특별하고, 그런 동시에 아쉽기도 하다. '만약 그를 잘 아는 지금쯤 공연을 보았다면, 이 공연은 얼마나 깊게 기억에 남았을까?' 같은 아쉬움인 것이다. 08년 이전에 본 콘서트 중 내 기억에 남는 건 빌리 조엘과 조성모 뿐이었다. 그나마도 조성모는 뒤에 여학생들이 트리케라톱스 비명을 공연 내내 지르길래 기억에 남은 거고, 순수하게 공연으로 기억에 남은 건 빌리 조엘 밖에 없었다. 음악을 거의 모르던 당시의 내게도 놀라웠던 관록과 능력. 그 계기는 고마운 초대권이었다.


어머니가 VIP석 초대권을 얻어오셨다. 갈래? 라고 물어보시는 어머니께 나는 빌리 조엘의 대표곡을 여쭸고, 내가 아는 건 'Piano Man' 밖에 없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귀한 기회인 것 같아 차 타고 출발. 그 때 막 린킨파크에 입문해서 외국 노래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게 다행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막히는 찻길을 겨우 뚫고 다다랐는데, 빌리 조엘은 콘서트 포스터에서 본 것처럼 중후한 할아버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라 모두 기억은 못 하지만, 'Honesty'를 부를 때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Piano Man'에서의 소름돋는 떼창 광경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특히 'Piano Man' 도입부에서 환호하던 사람들의 모습과, 혼자 피아노에 하모니카, 보컬까지 북 치고 장구 치는 빌리의 모습은 .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Hey Jude' 라이브를 방불케 했다.


"진짜 좋았어요." 소감을 묻는 어머니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2007년에 이 정도 기억이면 정말 큰 공연이었던 것이다.


공연 이후, 나는 어머니와 차안에 앉아 차가 빠질 때까지 '매번 적자를 면치 못 하는 월드컵경기장의 운영방향'과 '대만팀에 충격패한 SK 와이번스' 이야기를 나누었다. 'Piano Man'의 임팩트가 그 날을 전부 기억에 남기는데 큰 도움을 주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훗날 가치가 더욱 커져 가길 잘한 공연'을 살펴 보았는데, 내 콘서트 역사에선 공연 외적인 (즉, 사적인) 사정으로 공연이 깊게 남은 경우 또한 많았다. 그린데이(Green Day)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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