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아껴 온 솔직한 심정 털어놓기
레포트 쓰다가 마침 여유가 생겨서 몇 자 적는 거다. 귀한 시간 쪼개는 건데 이 글을 쓰면 내게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싶다...
그래도 한 번 주제가 정해지면 쓰고 봐야 되는 성격이기에 한 번 되짚어 보겠다. 2008년 5월 1일, Sum 41을 시작으로 시작된 나의 공연인생을.
2008년부터, 말은 10년간이지만 5년 가까이 되는 세월을 유학이니 뭐니 해서 쉬었다. 5년간 내가 '제대로' 봤다고 하는 뮤지션은 약 50팀인데, 여기서 '제대로'는 최소 60분 이상, 그리고 기억에 남은 뮤지션을 말한다. 즉,
1. 락페스티벌에서 45분 보다 관뒀던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 그리고 디스클로저(Disclosure)는 내가 본 뮤지션에 포함 되지 않는다. 행사 등지에서 2~30분 노래한 뮤지션도 전부 제외한다.
2. 어떤 노래도 모르는데 초대권을 받아 우연찮게 보고 온 뮤지션 또한 포함하지 않는다. 아무런 기억이 없기에 후기를 쓸 수 없다. 대형 뮤지션은 웬만큼 알기에, 사실 이런 경우는 클럽공연을 하는 인디 뮤지션인 경우가 많다.
3. 합이 60분이더라도 30분 씩 두 번 본 뮤지션은 제외한다. 메탈리카(Metallica)와 건즈앤로지스(Guns N' Roses) 오프닝으로 봤던 베이비메탈(Babymetal)이 이에 해당한다. (한 번을 '제대로' 봐야한다)
사람들은, 공연만 갔다오면 "OOO 짱!"을 외치는 나의 행태를 보며 "네가 싫어하는 공연이 있냐"고 되묻곤 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내가 실망한 공연을 굳이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오해 받는 것이다. 나는 내게 실망스럽더라도, 누구에게는 인생의 공연일 수 있기에 웬만한 공연에서 혹평은 자제하는 편이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 RHCP)나 콜드플레이(Coldplay), 뮤즈(Muse) 공연이 이에 해당한다. 공연 직후엔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하며 긍정적인 점을 찾아 후기를 적곤 했지만, 사실 세 공연 다 높은 기대치에 비해서 실망스러운 공연이었다. 그네들 잘못이 결코 아니다. 그저 나의 취향 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공연취향은 사실 '듣는다'기 보다는 '대화한다'에 가깝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RHCP는 촘촘히 짜여진 셋리스트를 한치의 오차 없이 90분간 정확히 수행했다. 그러나 본디 내가 뮤지션에게 바라는 건 '최대한 많은 음악을 부르는 것'보다 '끝없이 대화하며 관객의 반응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 전년, 같은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였던 푸 파이터스(Foo Fighters)가 그랬다. 너네들 정말 미친놈이야, 우리가 여기 다시 오면 너희도 다시 올 거야? 그런 말들로 관객을 현혹하고, 제대로 갖고 놀 줄 아는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2015년의 밸리록을 최악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그 때보다 더 좋은 부지, 더 나은 환경에서 열린 2016년 밸리록 페스티벌에서 내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 건 메인 헤드라이너였던 푸 파이터스와 RHCP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의 RHCP는, 관객들과 같은 심정으로 호흡하는 선생님이라기 보다는 임무를 끝내고 냉정히 돌아가는 강사였다.
콜드플레이와 뮤즈 또한 비슷했다. 물론 뮤즈는 관객들의 개판 5분전 매너도 큰 몫을 했다만, 둘 다 지나치게 딱딱 떨어지는 공연 흐름이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 물론 팬이라면 음악을 실제로 듣는 것 자체로 황홀하지만, 나는 연주보다도 공연 그 자체가 궁금해서 가는 입장이기에 실망이라는 단어를 써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워낙 네임밸류가 높은 뮤지션이라, 그만큼 내 기대치가 높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팅(Sting) 공연도 사실 같은 기준이라면 실망에 가까웠을 거다. 그러나 나는 스팅에 껌뻑 죽고, 그의 밴드 폴리스를 위해서라면 엄지발가락의 털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인생 가장 황홀했던 기억으로 스팅 공연을 남길 수 있었다.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내가 저 뮤지션을 싫어해서 혹평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알아주시길.
사실 최악이었던 공연은 따로 있다. 네임밸류와 기대치를 떠나서 공연의 질이 최악이었던 경우다.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과 와이너리 독스(The Winery Dogs) 공연이 바로 그런데, 라빈은 관객의 매너와 본인의 아쉬운 대처가 중첩된 경우고 와이너리 독스는 그냥 사운드가 강아지 울음소리보다 못한 경우였다.
에이브릴 라빈 공연은 내 인생 두 번째 콘서트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Sum 41에서 스탠딩 콘서트의 참맛을 알아버린 나는 정확히 4개월 뒤 내한하는 라빈 콘서트 또한 용돈 반년치를 가불 받아 예매해 버렸다. 무통장입금 은행 바꾸려다가 입장번호 3번 놓친 게 압권이었는데, 어찌저찌 30번을 다시 잡아 펜스 앞 두 번째 줄에서 라빈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라빈 팬카페에 "3번 잡았어요!!"라고 광분하는 글이 올라와 내가 울고 불며 댓글 달은 기억이 난다. 댓글들은 "OO 님도 지난 번에 되게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양보해 주시죠", "자기가 놓친 걸 왜 글쓴이 님이 양보하셔야 하나요" 같은 의견으로 양분 되었는데, 글쓴 분은 미안하다며 자기가 가진 3번을 내놓지 않으셨다. 당연한 거다. 나 같아도 안 주지...)
첫 공연이 Sum 41이었던 나는, 그 곳 보컬 데릭 위블리의 아내였던 라빈 또한 같은 기대치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나온 라빈의 3집 "The Best Damn Thing"에 푹 빠진 상태기도 했고. 특히 수록곡 'Hot'을 그렇게 좋아했다.
멜론 악스홀, 현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열린 라빈 공연의 관객들은 처음부터 사람을 깔고 뭉개려고 난리였다. Sum 41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두 곡만 지나면 될 거라 버텼지만, 라빈은 그 정도를 넘어서 호흡곤란이 오는 수준이었다. 당시의 중학교 2학년이 버틸 정도가 아니었다. 앞 사람 머리카락을 입에 넣어보는 등, 온갖 변태적인 행위를 본의 아니게 하고 있었다. 결국 세 곡 정도 끝나고 공연중단. 이 뒤로 나는, 아마 내 공연 인생에서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보지 못할 광경을 본다.
관객들이 텅 빈 무대에 어리둥절하자 경호업체 측에서 스탠딩 구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임시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경호원 한 분이 무대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여러분이 계속 이렇게 밀치고 그러시면~ 라빈이 공연을 못 해요~"
이건 진짜 중학생이라 별 생각 없이 넘어간 거지 지금 나이였다면 후기를 석사 논문 분량으로 적었을 거다. 유치원생 어르듯 올라간 경호원 선생님과 그에 맞춰 "네~"하는 해바라기반 아이들. 그 날 관객과 공연진행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한순간이었다. 좌우라던가, 하다못해 앞뒤로 스탠딩 구역을 나눴다면 애초에 사람이 쓰러질 일도 없었다. 라빈은 그 날 아무 말 없이 들어갔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나와 공연을 계속했다. 라빈은 Sum 41과 많이 달랐다. 뒤로 밀려난 나는 그렇게 90분 정도를 쓸쓸히 팔짱 끼고 시시하게 그녀를 관람했다. 가장 좋아하던 'Hot' 또한 1절에서 끊겼기에 실망이 곱절이었다.
와이너리 독스는 멤버들의 훌륭한 테크닉과 별개로 최악의 사운드가 발목을 잡은 경우다. 세상세상 그런 소리를 내는 공연장이 있을 줄이야. 공연장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보컬은 먹히고, 악기소리는 쌓이고... 그 날 보컬 리치 코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때는 어쿠스틱 연주 때 밖에 없었다. 스팅 공연 또한 같은 곳에서 열려, 나는 주최사 부회장 님 페이스북에 예의 갖춰 간절하게 읍소했었다. "스팅만큼은 사운드로 발목 잡히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사운드 철저하게 해주세요. 제발요..."
물론 그 분의 답은 없었지만, 좋아요가 백 단위를 넘긴 덕인지 스팅 공연은 훨씬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물론 사운드가 떠다니는 건 여전했지만, 기대를 한껏 낮춰서 그런지 그 정도 구현해 주신 것만도 엔지니어와 부회장 님께 삼보일배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생하셨다. 감사하다. 사랑한다.
별로와 최악이었던 공연을 지금까지 짚어보았는데, 사실 이런 공연들도 훗날 재평가 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2009년에 갔던 오아시스(Oasis) 공연처럼 말이다.
원래 간단히 되짚기만 하려고 했는데,
쓰니까 길어져서 2편으로 잇겠습니다.
3~4편까지는 갈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