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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Jan 05. 2018

스물다섯, 꿈이 사라지는 나이

머리는 크는데 꿈은 작아지더라

내가 스물다섯이 되었다. '반오십', 입에도 달라붙고 표현도 맛깔나는 이 말을 얼마나 입에 달고 살았던가. 언제나 형과 누나였던 그 이름은, 마침내 내가 말을 놓아 동등한 위치에 설 것을 허락했다. 스물다섯, 이제는 이십대 초반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자조 섞인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는 청년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평생 오지 않을 줄 알았던 군입대와 취직, 결혼을 모두 겪었거나 고려해야 하는 나이. 어렸을 땐 이 나이면 통일이 될 줄 알았다. 취직은 일사천리로 따놓은 당상일 줄 알았다. 결혼은 나이 차면 알아서 따라오는 의례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언제나 '불편한 현실'이었다. 언젠가는 생각해야 하지만 지금은 미루고 싶은 계획들. 나는 이 세 가지를 평범함을 대변하는 존재로 생각했고, 그렇기에 세 가지가 모두 이뤄지는 순간을 '꿈이 사라지는 순간'으로 생각했다.


내게 무한한 영감을 주었던 빌리 조 암스트롱 (Billie Joe Armstrong)

어릴 적 내 꿈은 세계구였다. 브런치 도메인에서 드러나듯,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를 존경해 영화감독을 꿈꿨으며, 음악에 빠진 이후로는 월드투어를 다니는 락스타의 삶을 살고 싶었다. 내 영어이름 또한 빌리 조 암스트롱(그린데이)의 이름을 딴 빌리였으며, 유학 1년차에는 스쿨밴드의 일원으로 건즈 앤 로지스 노래를 커버했다.


한 가지 우스운 건 그 때의 나도 밴드를 취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체조경기장을 매진 시키는 상상도, 그리고 마스터플랜을 하루가 멀다하고 그리던 소년이 정작 음악을 장래로 여기지 않았다. 스쿨밴드는 두 기타리스트의 전학으로 해체 됐으며, 나는 그 이후 졸업 때까지 변변한 밴드활동을 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런 상상도는 허상으로 가득찬 자기위안에 불과했다.


나는 꿈을 열렬한 환상으로만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련한 현실에 다가왔다. 누구나 어릴 때는 세계를 무대로 하며, 나아가 우주를 꿈 꾸기도 한다. 모두가 상상으로 한번 쯤은 국위선양을 해봤으리라. 노벨상을 타든, 대통령으로 외교관계를 개선하든 우리의 무대는 세계였다. 나는 그게 그래미고 월드투어였을 뿐이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자신의 무대를 벗어나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영리해질 수록 꿈의 크기를 줄였다. 어릴 적 꿈은 모두 허상이고, 지금이 진짜라는 '이성'을 앞세웠다. 초딩 때 품었던 영화감독의 꿈, 고딩 때 은밀히 품었던 락스타의 꿈- 나는 이 둘을 모두 '취미로서가 낫다'는 핑계로 씁쓸히 접어버렸다.


무모함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소망, 여기에 내가 단 한 번의 무모함이라도 보여 봤던가. 떠올려 보니 없었다. 그러다 보니 꿈이 세계구에서 전국구로 줄어버렸다.


작년 초, 나는 대학을 외국에서 다니는 탓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밴드를 나가야 했다. 리더 역할을 하던 형은 내게 진지하게 대학을 자퇴하고 함께 할 생각이 없는 지 물었다.  그 때의 나는, 그러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며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 형은 내게 말했다.


그래, 너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서른까지는 만회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서 서른까지 죽도록 해보고 안 되면 그만 둘 거다.


그 형은 실제로 현재 자신이 받는 봉급을 모조리 음악에 투자하고 있다. 더 좋은 소리를 뽑기 위해서, 그리고 더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 말을 복기해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내가 진정 바라던 건


먼 미래에 최소한 "능력은 없지만 노력했다" 따위의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취직을 위해 노력한다. 이력서 공백을 한 줄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아등바등 하며, 갖가지 감투를 쓰고 있다. '대기업 취직' 따위의 보상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그 보상을 얻는다고 해도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꿈은 현실과 한없이 타협했으며, 합격이라는 결과물은 그 타의 최종타결일 뿐 아닌가. 결국 내가 원하는 건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그래서 취직이 두렵다. 결혼도 두렵다. 늦지 않았다며 위안할 수 있는 허상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렵다. 어렸을 땐 몸이 작은 대신 원대한 포부를 갖고 살았다. 반면 지금은, 머리가 크는데 꿈은 줄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꿈이 작아지는게 두렵다. 언젠가는 꿈이랍시고 지역구 단위를 내세울 지도 모를 일이다.


중년이 되면 어린 시절 꿈의 흔적이라곤 내 영어이름 뿐이겠지. 나는 늦은 나이에 인생을 걸어 성공한 락스타를 수도 없이 알고 있지만 여전히 용기를 낼 수 없다. 그래서 내 자신이 싫은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더욱 내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진다.


스물다섯,

열렬한 환상을 벗고 아련한 현실에 기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부록

https://www.youtube.com/watch?v=4Yy6pmsQ9H8

출처 Journey 공식 유튜브

본 영상은 미국의 전설적인 락밴드 저니(Journey)의 'Don't Stop Believin'' 라이브 영상입니다.


영상의 주인공은,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 온다'는 격언의 산증인으로, 저니에 가입한 지 벌써 10년이 넘은 필리핀 출신의 보컬 아넬 피네다(Arnel Pineda)입니다.


아넬은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의고 빚으로 아버지를 잃어 홈리스로 공병팔이를 해야 했습니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가 유일하게 가진 재능은 모창이었고, 그렇게 그는 삶의 수단으로 모창을 선택합니다. 가끔 자기 노래도 내면서, 언젠가 빛을 볼 날을 기약없이 기다리면서.


특히 아넬은, 저니의 보컬 스티브 페리(Steve Perry)의 모창을 기가 막히게 했다고 합니다. "넌 스티브와 똑같아", 그가 항상 듣던 극찬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관객이 아넬의 모창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게 되는데, 이는 결국 그의 삶을 송두리 째 뒤바꾸게 되었습니다.


스티브를 잃은 후 10년 째 새 보컬을 찾던 저니 멤버들이 그 영상을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아넬을 미국의 오디션 현장으로 초청하는데, 이 때 아넬의 나이가 40이었습니다.


"저니 보컬 오디션 보러왔다"는 말을 아무도 안 믿어 심문까지 당했던 아넬. 그러나 결국 그는 저니의 보컬이 되어 필리핀으로 금의환향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저니 최고의 대표곡인 'Don't Stop Believin' (믿음을 멈추지 말아요)'을 외치며 필리핀 국기를 흔들죠.


'꿈'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짠할 영상.


저와는 먼 이야기지만, 이 영상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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