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나는 면회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향했다.
계절은 어느새 봄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병원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출산 후 한 달이 지나도록 나는 산후조리 대신 병원을 오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매일 같은 복도, 같은 인큐베이터, 같은 기계음.
그 속에서 단 하나 달라지는 게 있다면 아이의 미세한 변화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숨소리가 불안정했고 체온이 들쭉날쭉했는데,
이제는 모니터의 수치가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내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면회시간 10분 전, 복도에는 늘 조용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리문 앞에는 보호자들이 줄을 섰고, 면회 시간이 되면 한 명씩 면회실로 안내되었다.
면회 하려고 줄을 서 있을 때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거나 000님 아기라고 부르며
진료비 청구서를 나누어 주었다.
2주에 한 번씩 병원은 치료비를 정산했다.
나는 그 봉투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야. 아이가 오늘도 살아 있다는 증거야.’
그런데 어느 날, 간호사들 사이에서 조용한 대화가 들려왔다.
“○○ 아기 보호자 아직도 연락 안 되죠?”
“네, 병원비도 밀리고 있고… 전화를 안 받으세요.”
그 대화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를 두고 사라진 부모, 면회 명단에서 지워진 이름.
병실에는 여전히 아기의 인큐베이터가 있었지만,
그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떠나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매일 찾아왔다.
기적을 기다리는 곳은 그렇게 희망과 상실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아이를 보러 다니는 동안 가족들도 하루하루를 함께 긴장 속에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한 번도 면회에 오지 않으셨다.
“그 작은 아이를 내가 보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될까 봐, 그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봐
차마 오지 못하셨다.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 말이 더 아프게 들렸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작은 생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큐베이터 속 아이는 여전히 작았다.
뼈마디가 드러난 피부 위로 얇은 혈관이 선명했다.
산소 튜브가 코 옆으로 지나가고, 작은 발에는 주사관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놓인 작은 체온계를 바라보았다.
36도.
그 숫자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면회시간은 짧았다.
나는 매번 인큐베이터 가까이에 서서
아이의 호흡과 몸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그날도 평소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엄마 왔어. 오늘도 잘 버텼구나.”
그 순간이었다.
아주 미세하게, 아이의 오른손 손가락이 움직였다.
처음엔 내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그 작디작은 손끝이 천천히 구부러졌다가 펴졌다.
모니터의 수치가 안정된 채로 아이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날의 그 한순간만큼 그 문장이 또렷했던 적은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손끝 하나 움직이는 그 작은 몸짓이 그동안의 모든 고통을 덮어버렸다.
나는 인큐베이터 뚜껑 위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우리 아기.
그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니까… 이제 정말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얼마 뒤, 체중은 다시 600g을 넘었다.
의사는 말했다.
“이제 조금씩 회복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몸이 힘을 찾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병원 복도에서 한참을 울었다.
기적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작고, 조용하고, 그러나 확실한 움직임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그 손가락의 떨림은 내게 ‘희망의 언어’였다.
말도, 울음도, 웃음도 없던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에 보낸 신호.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나는 다시 세상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