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웅주 Sep 02. 2018

집의 연대기


속물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 나는 이미 속물이었다.


우리 가족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 허름한 빌라에 세들어 살다가 올림픽이 열릴 즈음 1988년, 당시 성동구 화양동으로 이사를 왔다.


허름한 빌라는 그대로였으나 구/동 이름이 바뀌었고 골목이 바뀌었고, 친구들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집주인이 바뀌었다.


당시 화양동은 화양리로 더 유명했다. 서울 안에 있는 동네에서 ~리로 끝나는 동네는 질이 안좋은 동네라고 어른들이 말했다.


미아리, 수유리, 화양리 다 그랬다.

당시 건대 앞쪽은 최루탄 냄새로 늘 코가 매웠고, 반대편 화양리 쪽은 저녁이 되면 켜지는 네온사인으로 눈이 매웠다.


유치원에 다닐 때 양품점을 하다가 화장품 가게로 업종을 변경한 엄마는 열심히 장사를 했고, 우리 가게의 안쪽에는 방 하나가 있었다.


초등학교까지 그 방에서 다 같이 살았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 쯤 조금씩 살림이 펴지고 있었는데 대신 가족의 화목을 갉아먹으며 살림이 나아졌다.


우리 집 = 화장품 가게 앞쪽은 4개의 골목이 교차하는 나름대로 우리들만의 교차로였고, 저녁이 되면 화장품 가게 웅주, 떡볶이집(문구점) 가게 지희, 방수 공사집 가게 성은이가 나와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거나 달리기를 했다. 거의 매일 놀았으나 친구들이 가끔 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떡볶이집은 그 날 문을 일찍 닫았고, 방수 공사집 가게 아저씨는 술을 마시고 와서 아줌마와 싸웠다.


그럼 나는 한 칸짜리 방에 들어가 방 속 모서리의 어두운 구석에서 혼자 상상하거나 가게로 나와 엄마랑 같이 가게를 봤다.


화장품 가게를 하던 우리 옆집은 부동산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중소기업이 있었다. 드링크제의 플라스틱 뚜껑 같은 걸 만드는 회사였는데, 지하에는 공장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 동남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종종 그 빌라의 방에 모여 사는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노동자들이었다.


집주인은 매일 저녁이 되면 콩코드 승용차를 타고 집 앞에 나타났는데, 기사가 먼저 내려 차 뒷문을 열어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왔다. 우리 아빠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우리 할아버지보다는 나이가 적어 보였는데, 늘 말끔한 정장을 입고 내렸다. 인사를 하면, 빙긋 웃으며 받아는 주었는데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당시 내겐 '집'의 개념은 없었다. '방'이나 '가게'가 '집'의 개념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주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골목길에서 미니 농구를 하거나 팽이를 치거나 카드(스트리트파이터 카드) 놀이를 하곤 했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미니카가 유행이었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슈퍼콤이나 세가세턴, 훼미컴 같은 게임기가 유행했다.


어느 날 골목집에 있는 단독주택의 2층에 살던 관이라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게 되었다.


통통한 체구에 부티 나는 친구의 집에 들어가서 석조로 된 2층 집을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집 안에 들어가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며 갈색 마루가 보였고, 3개 정도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흔히 말하는 '양옥집'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업을 하는 아빠는 회사에 갔고, 엄마도 일을 한다고 했었다.

그 친구는 다소 캄캄한 거실을 지나 (그 때 눈에 쇼파가 들어왔고, 서재 같은 것도 들어왔다. 낯선 풍경이었으나 지금도 생생하다) 자기 방(!?) 에 들어갔다.


삼성 알라딘 286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고, 전원을 누르자 검정 화면에 녹색 글씨들이 뭐라 뭐라 뜨면서 컴퓨터가 켜지는 모습을 처음 봤다. 익숙하게 디스켓을 꺼내서 본체에 넣고 뭔가를 누르자 페르시아의 왕자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그 페르시아의 왕자


그 친구는 익숙하게 악의 소굴에서부터 공주를 구하는 페르시아의 왕자가 되어 물약을 마시고 장애물을 건너고 악당과 칼싸움을 펼치는 동안 그런데 사실 나는 키보드도 손에 대지 못했다. 나는 옆에서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집에 들어와 나는 일기를 썼다.

친구네 집에 갔다. 그 친구네 집은 크고 거실도 있고 방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게임도 있다.

우리 '집'이 부끄럽다.


속물이 무슨 말인지 잘 알던 시절 그때도 나는 속물이었다.


광고회사의 특성 상 매일매일 밤을 새거나 야근을 하면서 때로는 보드를 바닥에 깔거나 쇼파에 누워 잠을 자던 그 시절이었다.


나는 젊음과 열정을 태워 돈을 벌었고, 그 돈은 태운 젊음과 열정에 비해 터무니 없는 돈이었다.


첫 회사는 4층짜리 단독 건물이었는데 돈이 많은 사장이 직접 건물주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유명 광고회사에서 세계적 상도 받았던 그 사장은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그러나 나는 연봉을 2000도 채 못받던 시절이었고, 그럼에도 꿈이 있었고 이 바닥에 발을 담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반면 빨리 이 좁디 좁은 회사를 떠서 더 좋은 회사를 가고 싶었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지고 볶던 그 30대 초반, 그 회사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적당한 키에 너무 말라서 로우킥을 때리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던 그녀는, 얼굴이 하얗고 긴 생머리에 단아한 이미지였다.


그 때 당시 건조하던 2년여의 의미 없던 연애를 마치고 난 이후였다.


혼자 남아 야근하던 시간, 우연한 계기로 혼자 남아 야근을 하던 그녀의 프린터를 고쳐주면서 인연이 시작되었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해심이 많고 얼굴이 예쁘고 마음씨도 곱던 그녀는 집이 인천이었는데, 가끔 인천까지 가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서로 마음이 잘 맞던 우리는 은연 중 미래를 함께 고민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녀의 집에 가게 되었다.


3녀 1남 중 장녀였던 그녀의 집은 인천 서구의 한 허름한 아파트였는데, 사실 아파트라 하기에는 아파트에게 미안할 정도로 옛날 집이었고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이 계단만 있는 4층짜리 아파트였다.

집에 들어가니 좁은 부엌(+거실)에 방이 2개가 있는 구조였다. 동생들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서 자는 좁은 집이었다.


허름한 구조에 낡은 가구에 그러나 깔끔하던 방이었다. 그녀의 동생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우리는 같이 좁은 방에 다 같이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들이 마트에 갔을 때 그녀와 사랑했다.


눈에 낡은 가구와 벽지를 보았고, 코로 집 냄새를 맡았다.

나는 결국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헤어졌다.

<끝>

작가의 이전글 나의 계획은 사실 그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