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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단장 Sep 02. 2022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책을 내면서>


내가 쓴 것도 없는데 무슨 책을 다 낸다고 하네 생각이 든다. 어려서는 그렇게 글씨가 쓰고 싶은 것을 아버지께서 못 배우게 해서 못 써보고 그것이 원이 돼서 부엌에 불 때면서 부주깽이로 재 글어내서 재 우에 가자 써보고 나자 써보고 이렇게 배워서 그저 그럭허니 하고 있었지 절대 글 안다는 표정을 안 했습니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세월이 다 지나가고 남편이 저 세상 가고 나 혼자 살다 보니 적적해서 글씨나 좀 나아질까 하고 도라지 까서 판 돈으로 공책을 사서 쓰기 시작한 것이 손주가 그것을 일기라고 소문을 내서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일복을 타고나서 일을 할 때가 행복하고 일을 해야 내 정신을 붙잡고 정신이 나는데 나이 많아 숨차고 일이 줄어드니 일기라고 쓸 것도 없습니다.


콩도 전에는 소만에 심었는데 지금은 하지가 다 되어서 심고. 모든 것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벌써 나와 동갑은 먼저 가고 나 혼자 남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사는 건지 걱정이 된답니다.


2018년 봄 서면 송천리 이옥남





<할머니 이야기>


내가 아홉 살 먹어서 어머이 돌아가셨는데 3월 초하룻날, 어머니 돌아가시고는 몰렀는데 차차 늦봄이 돼서 이웃에 밭 가는 소리 들으니 어머이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더라고. 7월 달인가 어른덜 김매는 데 따러갔는데 배낭그가 크지 뭐. 이런 아람드리. 아주 배낭그 밑에 배가 누렇게 떨어졌는데 그걸 줘다가 사발에 담아서 지청에 올려놓고 그 밑에 엎드려서 얼매나 울었는지. 어머이 배 먹으라고 어머이 배 먹으라고 그러민 그렇게 엎어져 울었어. 우리 할머니가 밥해 주러 왔다가 날 때리민 “이 마할 년아, 애미가 배 먹을 거 같으면 죽니?” 야단치던 기 엊그제 같은데.

-중략-

할머니가 공책에 쓰는 것은 ‘일기’나 ‘글’이 아니라, 그저 ‘글자’ 일뿐이다. “글씨가 삐뚤빼뚤 왜 이렇게 미운지, 아무리 써 봐도 안 느네. 내가 글씨 좀 늘어 볼까 하고 적어 보잖어”하시며 날마다 글자 연습을 한다. 낮에 일하고 들어오면 땀에 젖은 옷을 빨아 널고 방에 앉아 글자 연습을 하신다. 날씨를 적고 그날 한 일을 적고, 그리고 이제 몇 자 적어 본다로 끝나는 글자들.

할머니는 봄 여름 가을 자연 속에서 일과 함께 산다. 복숭아꽃 피면 호박씨 심고, 꿩이 새끼 칠 때 콩 심고, 뻐꾸기 울기 전에 깨씨 뿌리고, 산벚꽃 필 때 나물 하고, 매미 울 때는 김매느라 바쁘고, 깨꽃 떨어질 때 버섯 딴다. 손을 쉬지 않는다. 누군가 일을 좀 쉬엄쉬엄하라 하면 벌컥 화를 낸다. 나이 들어 숨이 차지 어디 일해서 숨이 차냐고, 날마다 곡식들 커 가는 것 보면 귀엽고 사랑스러워 힘든 줄 모른다 하신다.

-중략-

짐승이나 작은 벌레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 곡식을 가꾸고 거두는 모습, 이웃에 대한 정성. 내가 찾고 싶고, 우리 아이들한테 찾아 주고 싶은 삶이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해서 할머니가 연습하는 글자들을 오래오래 읽을 수 있기를 빈다.


2018년 봄 탁동철

첫 페이지 넘기자 나도 모르게 마른하늘 소낙비 오듯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그리고 나. 가슴속에서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뜨겁고도 아픈 기억들과, 머릿속에 그려만 봐도 포근하고 아름다운 그들이 눈물의 의미이다. 할머니의 손자는 그저 ‘글자’일 뿐이라고 했으나 그 어떤 시인보다 진실되고 맑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로 내 곁에서 한 자 한 자 토닥여 주셨다.


나도 한 30년쯤 ‘글자’를 쓰면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시인이 되어있을까? 옥남 할머니는 아실까? 본인의 글에 이렇게 존경과 사랑을 느끼는 이가 있다는 것을.


할머니가 그저 글자 연습하려고 쓴 글들을 초등학교 교사가 된 손자가 모임에 소개했고 그렇게 문집을 내었는데, 그 문집으로 강의도 하고 하다 보니 양철북 대표가 감탄해서 단행본으로까지 내게 되었다고 한다. 단행본으로 나오기까지 알라딘의 마케터들이 북펀딩을 제안해 17일 동안 568명이 응원해 성금이 750만 원가량 모였다고 한다. 30년간의 일기 900여 편 중 151편을 선정하여 사계절에 맞게 내지의 색상도 틀리게 하고 글자 색상도 틀리게 하여 참 애정을 가지고 이 책을 펴냈구나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는 동안 사계절을 방 안에서 차 안에서 어떤 공간에서든 느낄 수 있었고, 그저 빌려 봐야지 했던 이 책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신 할머니의 글 솜씨가 너무나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할머니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은 누구보다 아름답고 젊고 눈부시다.


이 세상은 남은 다 좋다는데 내 마음은 왜 이다지도 복잡할까 울고만 싶네.

날짐승이나 됐으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리지. 

봄철은 차츰 다가오고 온갖 새 짐승 소리는 들려오는데 이 심정은 어쩌면 좋으려나.

p22


누가 집으로 들어가기에 큰딸이 온 것 같애서 얼른 일어서서 집으로 오는데 진짜 딸이 왔네. 정말 반가웠지.

그런데 금방 가니 꿈에 본 것 같구나.

p28


때는 좋은 때라 산천초목은 피어서 푸른 산이 푹 어울리고 각색 짐승은 때를 만나서 서로 좋다고 지저귀고

이 내 마음은 갈수록 태산 같구나.

p53



좋아하는 색연필로 가슴에 내려앉은 문장들을 색칠해 가며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 하는 감탄사와 뜨거운 눈물, 터져 나오는 웃음까지 할머니의 아흔일곱 해의 인생길을 함께 걸어보며 밤을 새우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사투리도 많고 맞춤법도 틀린 부분이 있지만 이렇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책을 내어준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왜 자꾸 뛰나가너>

올해도 산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졌다.

날마다 도토리 까는 게 일이다. 망치로 깨서 깐다.

안 깨면 못 깐다. 반들반들해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p141


왜 사람은 나이가 많으면 정신이 흐린 지 답답하다. 

날씨는 왜 날마다 흐리고 비가 오는지 사람이라면 이제는 고만 오라고나 하지.

p137



예전부터 나도 할머니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참 행복해하실 생각만 해도 흐뭇한데 말이다. 나의 부족함으로 미루고 미루었으나 옥남 할머니보다 아직은 어리신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써 보아야겠다.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하실 때마다 제발 텃밭에 그만 가시라고 해도 ‘고것들 니들 보는 것 마냥 이쁘고 사랑스럽다’ 하시는 우리 할머니와 옥남 할머니는 무척이나 닮으셨고 ‘글자 모르면 성당 가서 성경공부 못해 부끄럽다’하시며 학교 다녀온 나를 붙들고 공부 가르쳐 달라시던 나의 할머니. 비록 무슨 글자인지 몰라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독특한 한글의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내가 가르쳤으니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이나 옛 성현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내고 또 살아 나아가는 우리의 어른에게서 오늘을 또 살아나갈 용기와 지혜를 얻어 본다. 더불어 내 등을 토닥여 주는 투박하고 따뜻한 손길도 느껴본다.   


#아흔일곱번의봄여름가을겨울 #이옥남 #양철북 #독서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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