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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Jan 01. 2021

공간에 대한 기억

 대학생 때부터 다음날 일정을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다이어리를 보면 ‘Go 장소’라고 적힌 메모가 눈에 띈다. 장소를 먼저 적고 해야 할 일을 적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일단은 내 두 다리로 어디든 가야 한다. 일하는 공간으로 갔다가 식사를 하러 가고 따릉이(서울시 자전거)를 타고 공원으로 향했다가 도서관에 가서 작업하고 집으로 돌아와 빨래와 청소를 한다. 온종일 같은 공간에서 일하거나 쉬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도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지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외로운 방랑객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서울 생활을 하며 직접 두 다리로 한 걸음씩 걸어갔기에 용기와 자립심을 키워갈 수 있었다. 자유로운 여행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순간순간을 즐기며 다양한 존재를 탐구하고 탐험할 수 있는. 생각보다 많은 곳을 여행하진 못했지만 집을 떠나서 더 다양한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20대 후반, 트라우마 상담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상담 선생님은 가장 안정감을 주고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내가 떠올린 공간은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리븐델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프로도가 칼에 찔려 생사를 오갈 때 요정 족이 그를 발견했고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도착한 곳이다. 아무 걱정 없는 곳. 완전한 쉼의 공간, 따스한 햇볕이 적당히 스며들고 편안한 기운 흘러넘치는 곳이다. 자애로운 사람들이 모여있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이 부족함 없이 채워진다. 폭신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자세로 푹 쉴 수 있다. 자연 속에 있어서 고요하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언제나 이런 공간을 꿈꾸며 살았던 것 같다. 현실에서 내게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공간은 카페, 서점이었다. 카페도 책이 있는 북카페를 더욱 좋아하고 그곳에 식물이 있으면 생기를 느낀다. 언젠가 내 공간이 생긴다면 식물을 키우고 작은 서재를 만들고 싶다. 넓은 창이 있어 그곳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공간이면 좋겠다. 포근한 느낌의 잠자리가 있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나무로 된 책상 위 일기장을 꺼내어 일기를 쓴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방을 비춰주는 조명을 켜고 아로마 향초를 켠다. 고요하게 호흡하며 나와 대화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5년간의 서울 생활을 하며 고시원, 하숙집, 자취, 청년 주택 등 다양한 공간을 경험했다. 몹시도 외로워서 문밖으로 외로움이 흘러넘치던 공간도 있었고 함께 해서 따듯함을 느끼던 공간도 있었다. 처음 나만의 공간을 만나 은은한 조명과 향초를 피우기도 했다. 사실 어떤 공간은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을 닮아있다. 공간의 변화를 따라 내 모습을 찬찬히 돌아본다. 서울을 떠나 지금은 강원도 시골집에 와있다. 집안일을 하고 온라인으로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있고 자주 바닷길을 산책한다. 좋아하는 카페도 가고 서점도 간다. 가끔 서울에 가서 작업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빠르면 몇 달 길면 몇 년 안에 공간의 변화가 생길 것 같다.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궁금하고 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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