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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Apr 11. 2023

장흥, 생명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장흥 기행문

장흥에 가다


 가을의 끝자락, 서울 사당역에 하나, 둘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날은 생각보다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글쓰기 문예 학교 선생님, 동문분들과 함께 12인승 차를 타고 전라남도 장흥으로 향했다. 선생님 두 분께서 운전해주신 덕분에 먼 거리 편안하게 갈 수 있어 참 감사했다. 

 전라남도 장흥에는 연고가 없다. 이번 문학기행이 아니면 갈 기회가 없었을 지역이다. 먼 거리를 가야 하는 1박 2일 일정이 조금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얼마 전부터 허리 통증이 심해져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던 터였다. 하지만 처음 가보는 장흥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있었다. 

  문인들이 많이 탄생한 지역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접전지이기도 한 역사의 보고이기도 했다. 또 눈에 가장 들어왔던 것은 시 낭송과 대화의 밤이었다. 시 낭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시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만으로 따듯한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장흥, 동학농민운동의 기운을 잇다


 달리고 달려 마침내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도착했다. 영상실에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다. 장흥 석대 일대는 정읍 황토현, 공주 우금치, 장성 황룡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이며, 대규모 농민군이 참여한 최후, 최대의 격전지이다.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9년에 이어 국가지정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전시실에는 동학 관련 각종 책자 및 고문서를 전시하고 있고, 동학 농민군 및 일본군이 사용했던 무기류 등 다양한 전시물들도 볼 수 있다.

 관리들의 수탈과 외세의 침략으로 힘들어하던 농민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스러져 갔는지 모른다.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임했던 농민들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20대 때 연극을 했다. 강원연극제 금상을 탔던 작품 ‘가보세’에 할머니 역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가보세란 작품은 갑오농민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계속되는 관리들의 횡포에 농민들은 굶주렸고 아픈 사람들은 치료받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매일 같이 울어댔다. 남자들은 죽창을 만들어 전투 훈련에 돌입했다. 가운데는 여자, 어린이도 있었다. 

 이어 지창영 공동대표님의 정세 강연 <격변하는 세계와 우리 민족의 통일> 강의를 들었다. 백수인 교수님의 문학 강연 <장흥의 가사 문학과 현대문학> 강의도 유익했다. 이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부를 함께 관람했다. 

 백수인 교수님의 진정한 강연은 사실 시 낭송과 대화의 밤에서 꽃을 피웠다. 생생했던 과거 역사를 직접 경험했던 지난날의 이야기들은 더욱 깊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들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뜨겁고도 뭉클한 시 낭송과 노래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청정한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황빛 감들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정겹고도 맑은 곳이다.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처음 만나는 인연들을 어쩌면 그렇게 인자하게 반겨주실 수 있는지. 백수인 선생님 댁에서의 기억은 따듯함으로 마음에 남아있다.      


장흥바다에서의 사유

 오늘의 여정은 이청준 생가, 송기숙 마을, 회령진성으로 향하는 일정이다. 이청준은 장흥의 대표적 문인이다. 역사 속 인물들이 녹아있는 장소에 직접 가보는 일은 그 발자취를 따라 체험하는 것이기에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몇십 년 전의 풍경과 아주 같진 않겠지만 장흥의 풍경과 그곳의 터를 보며 심성을 엿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동기,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닷길을 따라 걷는 산책길을 걸으며 반짝이는 장흥의 바다 풍경에 감탄했다. 나의 마음은 타국에 일하러 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좋은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도 마음은 아려왔다. 마침 함께 일정을 소화하는 동료와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동료의 순수했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햇살이 출렁이는 바다를 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을 가장 중요한 삶의 동기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내가 품은 사랑이라는 정의는 과연 어떤 것이었나. 스스로 채워지지 않고 채워주길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구걸에 가까웠다. 사랑과 자립은 다른 것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삶에 대한 동기 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회피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애정을 빼앗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아프게 깨우쳤다. 내가 가진 사랑은 너무도 작은 사랑이었다. 바다를 사랑하듯이 그저,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텅 빈 마음으로는 참된 사랑을 줄 수 없었다. 조금만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겁을 먹고 주춤하는 나에게 장흥의 인물들은 그렇게 휘청이면서도 한 걸음씩 나아가보라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 같았다.


장흥은 따듯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애잔함이 흐르는 장소다. 장흥의 이야기와 사람은 마음을 순수하게 젖어 들게 한다. 양심으로 살아오고 떠나간 사람들이 바람이 되어 떠도는 곳이다.

 지나온 역사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어떠한 사건은 때로 개인의 삶에 강하게 다가와 사람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행동하게 한다. 한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되고 열 명, 백 명, 천 명, 만 명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현시대는 생존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 노동의 방식 등 삶의 질에 대한 문제가 커지고 있다. 사람을 죽여서 큰돈이 들어온다면 너도나도 그렇게 한다는 세상이다. 자본주의사회는 편안함을 제공하는 듯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환경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고귀한 양심을 병들게 한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에게 그런 게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양심도 빨래가 가능하다면 깨끗하게 빨아 더러운 먼지를 씻어내고 햇볕에 잘 말려 다시 맑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돈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지만 결핍마저 채워 줄 수는 없다. 그것은 마음의 영역이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찾아오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 지금 찾은 답은 이렇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라는 것을. 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다.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길은 양심을 회복하는 길이다. 장흥이 들려주는 이야기 앞에서 희망이라는 등불을 켜고 용기를 품에 안고 삶 속으로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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