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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Apr 14. 2023

사랑의 씨앗



 제주 애월 숙소에 도착했다. 나무와 벽돌이 반반 섞인 내부 모습이 따듯한 느낌을 주었다. 베란다 쪽 너른 창으로 애월 바다가 보였다. 서해안 쪽이라 저녁이면 바다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트는 모습은 동해에서 자주 봤는데 서쪽 애월 바다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바다로 해가 지는 모습 보고 있으니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애월까지 오게 된 과정을 떠올려본다. 학생들에게 통일 관련하여 북쪽 안내원으로 일하며 한편으로는 연극 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목을 쉬지 않고 혹사해 결국 성대에 혹이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방 회복될 줄 알았지만 몇 주고 몇 달이고 낫지 않았다.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계속해서 일하는 데 압박을 느꼈다. 일도 연극도 인연도 모두 내려놓다시피 하고 비행기를 타고 먼 제주까지 왔다.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무더운 여름, 바캉스로 제주에 오는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가고 서핑을 즐기는 모습과 달리 제주에서 보내는 일정은 단순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다가 해 질 녘쯤 바다에 가서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에 위로가 됐다. 산책하던 중 만난 강아지와 할아버지를 보는 것도 힘이 되었다. 갈색 털을 휘날리며 꼬리를 살랑이는 리트리버를 보니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리트리버는 주인의 보폭에 맞추어 편안한 표정으로 느릿느릿하게 걸어간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밝았다. 말하지 않아도 할아버지와 리트리버 사이에 두터운 정이 느껴졌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에 거의 도착할 때쯤 엄마와 딸, 엄마의 어머니로 보이는 가족이 보였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멈춰 섰다. 아이의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인사해야지.”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이는 계속 뚫어지게 나를 쳐다봤다. “인사해줘야지” 엄마가 한 번 더 말했다. 아이는 그제야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안녕” 가족의 뒷모습을 보니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소중한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그것만으로 살아가는 힘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느낀다.      


  산책하는 할아버지와 강아지, 어린아이를 챙기는 가족의 뒷모습에서 따듯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외로운 마음이 차올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맞벌이로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오빠와 언니, 나, 자식 셋을 키우는 것은 부모님에게 버거운 일이었고 매일 다투고 힘들어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커져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가시가 되어 박혔다. 나에게 상처 준 이들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나를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내가 싫었다. 영영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애월 바다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 올랐다. 돌고래였다. 돌고래를 보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행운이라는 말이 있다. 바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돌고래, 그렇지, 바다에는 돌고래가 있지. 문득 누구에게나 마음 한 켠에 사랑의 씨앗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대한 마음 안에 자리한 다양한 씨앗들 가운데, 너무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사랑의 씨앗. 바닷속에 돌고래가 있다는 것을 믿듯, 자신 안에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언제가 되었든 가장 적절한 시기에 싹을 틔우지 않을까.      


 미움과 원망, 상처받아 아픈 마음을 느껴주어야 하는 때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봄과 따듯한 햇살이 가득한 날들만 이어질 수 있을까. 보다 진심이 담긴 마음을 주고받기 위해 찾아온 경험이라 받아들여 본다. 사랑하고 싶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 쏟는 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낭비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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