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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Oct 18. 2023

박준시인의 강연을 듣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제가 눈치를 좀 잘 보거든요.”


시를 쓰는 박준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온 청중들에게 말했다. 가볍고 캐주얼한 복장이다. 


“바닥에 앉으신 분들 깔 거 뭐 없나요?”


두리번거리며 깔 것이 없나 찾는 모습이다.

의자가 부족해 바닥에 앉아 있는 청중들이 시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딱딱한 데 앉으면 안 되는데.”


이내 강연이 이어졌다.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피피티에 띄웠다.

그가 윤동주 시인을 좋아해서 좋았다.

.

.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시인의 시에는 어려운 단어가 없다. 

일상의 단어를 고르고 고른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짐한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묵묵한 결심에

나의 마음도 움직이는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와닿는 것을 보면 시는 단순히 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쓴 이의 마음이 담겼으리라 생각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좋아하는 시는 ‘새로운 길’이다.

기회가 되어 글쓰기 강연을 갈 때면 늘 소개하는 시다.

.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나는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을 읽을 때마다 두근거림을 느낀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내일도 갈 길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이다.

비슷한 일상인 듯해도 늘 새롭게 여기는 마음에 활력이 생긴다. 그리고 희망을 본다.



“혹시 추우신가요?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눈치를 잘 봐서..”

박준은 강의를 하다 말고 또다시 청중의 눈치를 본다.

“네.” 청중이 답했다.

“에어컨 좀 꺼주세요.” 박준은 스스럼없이 스텝에게 요구했다.

이윽고 에어컨이 꺼졌다.


그는 눈치를 잘 본다고 말했지만,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보였다.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행동.

쉬워 보이지만 막상 여러 이유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지금의 움직임.


영화 추천을 부탁드리니 처음으로 단역 배우로 나온다는 ‘너와나’를 추천해 주셨다. 애정 하는 배우이자 연출가인 조현철 님이 작업한다는 소식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었다. 시인의 추천에 반가웠다.

나는 이분의 글을 종종, 어쩌면 자주 읽게 되겠지. 

그리고 강연이 있다면 찾아가서 책을 가져가 싸인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단 몇 분 안에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가슴 뛰게 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순간이었다. 


가을 공기가 더없이 상쾌한 마로니에 공원 지하 강연장에서, 박준시인님의 강연을 듣고.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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