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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jestyy 언제나 Oct 20. 2020

신념으로 지키는 자존심


전남 강진에 간 적이 있다. 풍류 시인 윤선도의 고향,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너무나 아름답고 수려한 자연 경관 때문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유배를 떠난 양반 자제들이 뭐가 아쉬울 게 있었을까 싶지만 조선시대라 하더라도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청년들에게는 무덤이나 다를 바 없는 공간이었을 테다. 강진군은 유유자적 풍류를 즐겼던 시인 윤선도와 관련된 문화관광 인프라를 조성하는 듯했다. 게다가 그 고장 일대에 윤선도 집안의 영향력과 세가 높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선도와 관련된 곳을 찾아가기 위해 강진을 방문했다. 그런데 실수라 하기에는 우연에 가까운 착오로 정약용의 유배지를 찾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나는 답답한 조선 시대에 선진 문물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내 나라와 사람들에게 퍼뜨리고자 한 젊은 학자들의 움직임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기득권을 가진 양반 계층임에도 실용적인 학문을 하려 노력한 이들을 대단하게 여긴다. 믿음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편안함과 실질적인 이득에서 더 쉽게 믿음이 이뤄진다. 

정약용이 유배를 떠나 머물렀던 초당은 생각보다 높은 골짜기에 있었다. 포장되지 않은 시골 마을의 공터까지 차로 이동하고, 위로 오르는 사람과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이 마주 서면 꼭 알맞을 좁은 길로 골짜기와 이어지는 산길로 세상과 통하는 숨은 공간이었다. 지금은 시골 곳곳 마을 어디나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접근도 쉽다. 그리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지자체가 앞 다퉈 관광객 유치를 위해 시설을 정비한다. 그곳도 나름(?) 정비해서 그나마도 사람들이 다니게 된 곳이었다. 한 마디로 정약용이 유배된 곳은 그만큼 외지고 세상과 단절된 곳이었다.      

높지 않은 야산이지만 오르는 길이 험한 산 둔덕에 넒은 터가 나온다. 그 터에 기와집과 초가집 두 채가 덩그러니 있다. 크지 않은 기와집에 정약용이, 그리고 더 작은 초가집에 몸종들이 기거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건물 둘레를 둘러본다. 조그마한 연못이 있지만 마음을 달래기는 답답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아래가 내다보이지만 빼곡한 나무들에 가려 시원하게 탁 트인 전망도 아니었다. 그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척박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슴 속에 불덩이를 지고 진취적인 생각과 세상을 향한 자신감을 가진 청년의 마음은 타들어가지 않았을까. 적막한 이곳에 앉아 여유롭게 사색을 즐기며 책이나 썼을까. 아닐 것 같다. 매일매일 들끓는 열망과 울분으로 붓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정신을 온전히 두기 어려운 시간들을 감내했을 듯하다.      


정약용이 실제로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적 맥락에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젊은 선각자가 시대 앞에 무력해질 때 감내해야 할 내적 고통이 상당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당시 천주교도로서 믿음을 위해 많은 것을 잃어야 했던 정약용 집안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정약용의 유배도 그 연장선에서 있었고, 집안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국가로부터 벌(?)을 받고 있던 셈이다.      



믿음과 신념은 편안할 때보다 괴롭고 고통스러움을 동반할 때 추앙받는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단할 것 없는 정약용의 생가를 찾아 힘겹게 산을 올라가 둘러보는 것이 새삼 의미 있는 일이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은 것이 진정한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신념과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자들을 만난다. 어느 덕망 높은 스님이 말하기를 선(善)이라 믿으며 행하는 악(惡)이 대악(大惡)을 이룬다고 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것을 선이라 믿기 시작하면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을 자신의 자존심으로 승화시키며 신념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놓았던 이들을 보며 성찰해야 할 것이다.      


강진에서 아마 가을이 왔을 것이다. 한적하고 아름다웠던 그 곳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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