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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jestyy 언제나 Nov 04. 2020

별 건 아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6년 전 출산기


산후조리원이라는 드라마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6년 전 우리 아이를 낳을 때가 생각났다.      



퇴근 후 남편과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했다. 자유형 수업이 끝나면서 깊은 물에서 자유형도 연습하고, 배영 지도도 나가는 날이었다. 깊은 곳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아직 자유형이 미숙해서였을까, 숨 쉬기가 어려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영이 끝나고 집에 걸어오는 길, 남편과 수영을 좀 쉬어야겠다고 이야기 했다. 결혼한 지 한 달, 결혼준비를 하며 직장생활도 하고 이래저래 바빠서 몸이 힘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꿈을 꿨다. 바다를 드넓은 사각형으로 잘라내더니 내가 거대한 바다 육면체를 들어올렸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해수면을 잘라 들어올리니 바닷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없어지고, 저 멀리 보이는 잘라낸 대지 왼쪽 끝 귀퉁이에서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기어왔다. 엉금엉금. 거북이라 생각할 만도 했는데, 꿈에서도 ‘자라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임신을 했다.      


6개월쯤 뒤에 아이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혼을 좀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공동 취미생활로 수영도 다니던 참이었다. 예정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너무 행복했고, 나는 입덧과 여러 고통을 지나면서도 10개월 동안 아이를 품는 것이 좋았다.      

수많은 정보를 얻었고 많은 사람들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그래서 출산일이 임박한 날 오후 1시, 가진통(가짜진통)과 느낌이 사뭇 다른 찐진통이 느껴졌을 때 그냥 집에 있었다. 슬몃슬몃 집안을 정리하고, 집안일을 마무리 하면서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오는 6시 경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남편이 오자마자 말했다. 

        고기 먹으러 가자     

옷을 갈아입고 집 앞 고깃집에 갔다. 힘이 없으면 아이 낳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었다. 게다가 초산이라 아기도 금방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듣고 봤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오기 시작한 진통을 느끼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마지막 냉면은 먹지 않았다. 왠지 찬 음식을 먹으면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 걸어오는 5분 미만의 시간 동안 한 번 정도 쉬어야 했을 정도로 진통 주기가 가까워졌다. 보통 1분 정도의 진통 주기가 되면 분만을 위해 병원을 찾아야 한다고. 그래서 진통 주기를 확인해 주는 어플을 깔고 진통이 올 때마다 확인을 했다. 샤워도 하고, 병원에서 쓸 물품도 캐리어에 담고, 바로 나갈 수 있게 옷도 갈아입고, 집안 정리도 했다. 괜히 소란스럽고 싶지 않아 정말 1분 미만의 주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생각했다. 일찍 가 봐야 괴롭기만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영향도 있었다.      


새벽 1시, 남편이 다니던 병원에 전화를 했다. 1분의 진통 주기가 되었다고. 차로 10여 분 거리의 산부인과 병원에 도착했다. 미리 전화해 둔 덕분에 간호사가 문도 열어주고 문 앞에서부터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병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관장을 하고, 초음파 패드가 붙은 기계를 배에 붙인다. 저 쪽에서 먼저 온 산모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도 진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새벽 4시, 진통이 너무 심하지만 자궁문이 3cm가 열려야 무통 주사를 놓아줄 수 있다고 한다. 1cm가 열렸을 때 병원에 왔는데 3시간이 지나도록 2cm가 더 열리지 않아 나는 이제 진통 주기랄 것도 없이 몰아치는 고통 속에서 과호흡 상태를 경험한다. 그래서 산소호흡기를 꼈다.      


새벽 5시, 드디어 무통주사를 맞았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아팠는데, 무서우리만치 하나도 안 아팠다. 많이 자 두고 싶었는데 긴장감과 걱정에 편한 잠을 자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밤새 고통에 시달리던 나는 기절하듯 살풋 잠이 들었다. 무통주사의 효과는 두세 시간 정도 간다고 했다. 정확히 두 시간 뒤 다시 맞은 무통주사는 첫 번째보다 효과적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효과는 그대로였는데, 무통주사로도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시간들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렇게 두 번이 무통주사를 맞았음에도 고통은 해결되지 않고, 자궁문도 분만실에 들어갈 정도로 열리지 않았다.      


병원에 온 지 12시간에서 한 시간 모자란 정오에 나는 분만실에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에게 의사가 무통주사를 한 번 더 놔줄까냐고 물었다. 병원이 떠내려가게 소리를 질러댔는데, 나는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아뇨, 그냥 낳을래요

아이에게 좋을 게 없다고도 생각됐고, 더 이상 통증경감의 의미도 없을 듯했다. “그럼 아래쪽에 힘을 주세요. 소리를 지르면 힘이 위로 가니까 더 힘만 들어요.” 나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12시 10분. 우리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지난한 뒷 과정들과 산후조리원에서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우리 공주님은 무사히 우리집에 왔다. 그리고 출산보다 더 역대급인 육아는 현재진행형이다. 남들도 다 하고 사는 별 거 아닌 일일지 몰라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소중한 과정일 것이다.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그리고 아빠에게도.      



별 건 아니었을지 몰라도, 힘들고 고단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한 고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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