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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jestyy 언제나 Nov 05. 2020

사람이 하는 일이다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생면부지의 타인의 죽음이라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그 죽음이 허망하고 안타까우면 함께 슬퍼한다. 경험하지 않은 감정은 많이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스토리를 듣게 되면 공감을 하게 되는 경가 많다. 특히 어린 아이의 죽음, 피해자의 죽음, 그리고 착한 사람의 죽음에 우리는 많이 안타까워한다. 죽음은 모두의 것이고 현재진행형이지만 삶의 과정과 이야기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들의 죽음이 더욱 크고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를, 특히 선량하고 순수하며 성실한 이들을 죽게 만드는 것들에 분노한다. 잘못된 제도나 가해자, 때로는 신의 뜻에 분노한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무심하다. 본인의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긴 한다. 몰라서 어쩔 수 없었을 수도 있지만, 가해를 하면서도 몰라서 그랬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이다. 잘 모르는 것, 무지(無知)도 죄가 되는 세상이다. 수많은 정보와 기초교육을 통해 알지 않으려는 게으름을 범하는 것도 잘못의 범주에 들어가게 됐다. 익명성이 보장될 거라 생각해서 악플을 쓰는 일 같은 것은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여성이 수치심을 느끼는 데도 성적 농담을 계속하면서도 시대가 변한 줄 ‘몰라서 그랬다’는 것도 변명이 될 수 없다. 시대가 변했든 아니든, 법이 바뀌었든 아니든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마음이 있다면 조선시대라도 이뤄지지 않았을 잘못이다. 그래서 ‘몰라서’라거나 ‘뒤쳐져서’라는 말은 잘못을 덮는 변명이 되지 못한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 뉴스를 종종 본다. 불의의 사고나 자연재해 등으로 죽는 사람들도 너무나 안타까운데 하물며 살 수 있음에도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 얼마나 절박한 고통이 삶보다 죽음을 선택하게 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다. 단순히 자살이 나쁘다, 어쩔 수 없다의 문제로 치부되어 버리기엔 삶과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죽을 각오로 살아라’는 말도 하기 어렵다. 그 고통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지 당사자의 무게감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도와주고 싶고, 보듬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삶은 고통의 무게가 더해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이라는 선택지보다, 다른 선택지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노력은 개인이, 사회가, 국가가, 그리고 인류가 함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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