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해 나아간다는 것

인터뷰의 기억

by majestyy 언제나

한두 해 전인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통령직속 위원회가 구성됐었다. 현재도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만들고 있던 책자에 들어갈 인터뷰를 위해 위원장을 인터뷰했다. 당시 나는 다른 매체를 맡고 있었고, 해당 매체 담당자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야기 할 것 없는 복잡한 사정들에 의해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인터뷰이는 이름을 듣거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저명한 정치인이며 학자인 모양이었다. 연세가 지긋하여 원로가 되신 그 분을 사실 나는 잘 몰랐다. 그저 높으신 분들이겠거니 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인터뷰 자리에 임했다. 대담 형식의 인터뷰였기에 실제 질문은 관련된 분야의 교수가 던지는 형식이었고, 사전에 질문지가 전달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는 편집장의 위치로 취재에 참여하게 된 것이어서 녹취를 할 막내 작가도 대동했다. 한 마디로 할 일 없이 유명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오면 되는 일이었다.


6.25를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 시절에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교수로, 장관으로, 정부 기관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높으신 분이 된 그 분을 마주하고 앉아 이제 거의 한 세기를 살아낸 삶의 역사, 그리고 사회학자로서의 생각, 우리의 갈 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연세가 지긋한 원로에게 한 자리 준 거겠지, 저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이름만 걸고 있을 테고 일은 젊은 애들이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질문이 시작되고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예상과 달리 힘 있고 논리적이며 진취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질곡의 역사를 몸소 또는 빗겨 받아내는 동안에 사회학자로서 살아가기를 열망했던 그는 학자가 되어 사람들의 삶과 세상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의 가치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역사와 문화는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의 앉음새는 처음과 180도 달라졌다. 인터뷰이는 내 마음 속에서 더 이상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아니었고, 시대의 스승이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곁들이더라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고,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엄중했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힘이 있었다.

인터뷰 내내, 알고는 있지만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지난 역사를 몸소 경험한 이의 깊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거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대국들의 틈새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고통받지만 한민족과 함께 큰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3.1절 즈음에 이뤄졌던 인터뷰 이후, 몇 개월이 지난 뒤 8.15 광복절에 이뤄진 대통령의 연설에는 그 어르신이 한 말들이 녹아 있었다.

김구 선생의 “우리 민족은 문화 민족”이라는 말, 우리의 문화는 세계를 향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공개되고 소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


정치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으리라. 또한 여러 가지 정보와 시뮬레이션이 더해져야만 완성되는 이야기리라.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뒤로 하고 나는 그날 그 어르신의 이야기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희망을 느끼게 되었다. 여든이 넘은 연세였다. 세상이 어떻냐보다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어나가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고 희망적이다. 정체와 안정을 이야기하기보다 혁신과 변화를 꿈꾼다.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조차도 말이다. 꿈꾸는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기생충을, BTS를 이야기 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다양성과 변화에 익숙할뿐더러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물론 내가 만난 인터뷰이가 오랜 실무 감각과 사회적 지위 등으로 다른 어르신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게 뭐 대수랴.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나는 그 순간 전율을 느낄 정도로 그 어르신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새로운 희망과 꿈을 꾸게 되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꿈을 꾸게 해 주는 사람,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은 스스로 뿐만 아니라 가정을,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고 발전하게 한다. 당장 세계를 향해 나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느낀 것이었다. 너무 강렬하게 그 힘이 느껴져서 나조차도 힘을 내게 되었고, 다른 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희망이 가지는 파급력과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2시간의 짧았던 시간 동안 100년 가까이의 역사를,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파노라마처럼 듣고 느껴서였을까. 그날의 전율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 살림하랴, 육아하랴, 직장 생활 하랴 생활에 치여 꿈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BTS를 알 여유도 없던 나에게 우두망찰의 순간을 준 시간. 사진 촬영을 끝으로 인터뷰는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고, 인터뷰 기록은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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