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소여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의 격언을 되새기며
썸 타던 남자가 있었다. 프로젝트에서 동료로 먼저 알게 되었기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나의 연애관을 궁금해 했다. 자신의 연애 파트너가 되기에 내가 적합한지 아닌지 판단할 재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땐 내 감정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편하게, 그가 물어보는 대로 솔직하게 다 말했다.
"난 폴리아모리나 오픈 릴레이션쉽(다자 간 비독점적 연애) 존중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어색한 것 같아.”
“난 질투 같은 거 안 해.”
“난 연애가 끝나면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보는 ‘나’는 연애에 관해 한없이 쿨한 사람이었다. 사람 때문에 마음이 찢어져 본 적이 있었고, 한 사람에게 죽자고 매달려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이 사람 아니어도 세상에 만날 사람은 널렸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아픔은 없다, 인연이 아니면 몸서리를 쳐도 이어지지 않는다, 등등의 깨달음으로 인해 사랑과 사람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그간의 숱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사랑에 쿨한 사람'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한달도 채 안되어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누군가를 이 정도로 갈망하는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사람으로서 이성으로서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외적으로 이상형이 아니었기에 더욱 방심했던 걸까. 내 마음을 남김없이 다 줘버리자, 그간의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쌓아 올린 ‘쿨함’들은 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며, 그래서 질투를 잘 안 한다던 나는 질투의 화신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단둘이 있는 게 불안하고 싫었다. 우연히 마주친 그의 구여친을 보고 하루 종일 신경 쓰였다. 결국 타이밍이 안 맞아 썸이 깨졌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그를 정리하지 못했다… 얼마나 생생한 인지부조화의 현장인가.
말해 놓은 게 있으니 쿨하지 못한 집착을 드러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나조차도 ‘나답지 않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래도 속상한데, 티를 안 내려고 하니 마음이 지옥이었다. 내 연기 실력으론 완벽하게 감출 수도 없었다. 사소하게 툴툴대는 순간이 많아졌고, 이유를 모르는 그는 아마 내가 변덕이 심한 조울증 환자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겐 소유욕이 강하다고,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 인정하고 돌아서는 거 잘 못한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고 싶고 갈망한다고, 그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워 지금까지도 계속 뒤를 돌아보고 서 있다. 인연에 대해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 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내 걸로 만들고 싶다’며 강하게 요구했다면 어땠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뜨뜻미지근한 나의 온도에 차게 식어버린 그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불태울 수 있었을까.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 마크 트웨인
내가 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확신에 차 있었다. 비극의 시작점이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따라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세포들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세포의 종류에 따라 주기는 가지각색이나, 위장 상피세포의 경우 24시간 안에 모든 교체가 끝난다고 한다.) 이전과 다른 새 세포들로 교체되고,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생물학적 구성으로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은 항상 변한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며, 그렇기에 예전의 나로 말미암아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것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나에 대한 추측을 섣불리 상대에게 전하면서 일은 틀어지게 된다.
따라서 건방 떨지 말자. 나조차도 나를 모른다.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1835~1910).
'마크 트웨인'이란 필명으로 활동한 미국의 소설가. 미국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한 미시시피 3부작 <톰 소여의 모험>, <미시시피강의 추억>, <허클베리핀의 모험>이 대표작이다. 자유로운 영혼들을 주 캐릭터로 다루어 미국과 자유로움에 대한 찬양적 내용을 썼다. 말년에는 미국 노예제도의 모순에 대해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