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호캉스
짧지만 나로 돌아오기엔 충분한
처음으로 혼자 호텔에 묵어본 적이 있다.
혼자 여행을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집과 멀지 않은 호텔에서 여행도 아닌 휴식을 위해 혼자 시간을 보내본 것은 처음이었다.
혼자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보거나 도서관에 가보기는 했지만, 혼자서 호텔이라니 호사스러운 것도 같고 사치나 낭비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때 당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남편이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 나 또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보기로 하고 큰 맘먹고 강남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
체크인 시간인 2시에 맞춰 도착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체크인을 했다.
다소 자그마하지만 모던하고 깔끔한 방은 침대 옆 큰 창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좋은 뷰를 가지고 있었다.
호텔 특유의 쾌적함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일정도 할 일도 없는 여정 속에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노래를 듣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들고 밤이 되는 것을 구경하고, 낮잠을 좀 자다 깨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금세 저녁이 되었다.
많은 호텔 중에 그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루프탑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칵테일이나 와인을 마시고 방에 들어오면 완벽한 저녁이 될 것 같았다.
역시나 또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위층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루프탑 바는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
겨울이기 때문에 루프탑은 폐쇄되어 있고, 날이 풀려야만 운영을 한다는 이야기에 자못 실망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호텔 레스토랑의 근사한 저녁으로 달래 보자는 심산으로 한가하고 깨끗한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둘러보았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한국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미슐랭 가이드에 선정된 레스토랑의 셰프가 선보이는 레시피로 제공되는 메뉴가 눈에 띄었다.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냉가락국수이었다.
그 위에 토핑 된 새우튀김이 머금직스러워보이고 짐짓 미슐랭 추천 셰프의 레시피도 궁금해 냉가락국수를 주문했다.
작지 않은 레스토랑에 나를 포함해 세네 테이블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모두 커플들이었다.
부부 같아 보이는 커플도 있고, 연인 사이로 보이는 커플도 있었다.
토요일 저녁을 혼자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게 다소 눈에 띌까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나를 위해 선택한 저녁이니 즐겁게 먹자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곧 예쁘게 플레이팅 된 냉가락국수가 앞에 놓였고, 느근한 마음으로 한 젓가락을 떴다. 처음 맛보는 신기한 맛이었다.
유자향의 상큼하고 짭짤하고 감칠맛있는 자작한 육수와 쫄깃한 가락국수 면발이 잘 어우러졌다.
새우튀김도 소스를 적당히 머금어 바삭하고 향긋했다.
얇게 저며진 오이 토핑과 쫑쫑 썰린 실파, 면발을 함께 먹으니 더욱 입 안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맥주 한 모금이 간절해져 삿포로 한잔을 더 시켰다.
삿포로 몇 모금과 젓가락질 몇 번에 접시는 바닥을 보였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바로 옆 바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단체 예약이 되어있다고 했다. 아마도 신년회 등의 모임이 많은 시즌이었기에 주말에는 거의 대관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두툼한 외투와 머플러를 챙겨 입고 두르고 몹시 춥겠지만 이대로 긴 밤을 보낼 수야 없으니 추위를 뚫고 분위기 있는 바를 찾아 나서보자 하고 호텔을 나섰다.
날이 몹시 추워 눈보라도 조금씩 흩날렸다. 근처의 호텔에 바가 있을 테니 거기로 가보자 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겨우 도착한 호텔 로비 바는 한시 운영으로 문을 닫아있었다. 힘겹게 다시 그 옆 다른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앗뿔싸. 옆 호텔은 아예 리모델링 공사로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멀리까지 나와 돌아가기도 힘들고 가까운 번화가까지 어떻게든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귀가 애는 느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몇몇 가게 중 좋은 곳을 골라 갔겠지만, 그냥 가장 가까운 칵테일바로 서둘러 들어섰다.
작은 칵테일바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저마다 모여 시끌벅적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바에 한 자리가 겨우 있어 자리를 잡고 외투를 벗었다.
블랙러시안으로 시작해 화이트 러시안, 또다시 블랙러시안, 마가리타까지 네 잔을 홀짝홀짝 마셨다.
혼자 마시다 보니 너무 빨리 마셔버릴까 봐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며 최대한 천천히 즐겨보려 노력했다.
보통 바 자리에 혼자 온 사람에게는 바텐더가 말을 걸기도 하는데, 바쁜 탓인지 다행히 몇 마디 걸어오지 않았다. 바로 옆 자리에는 나보다는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 두 분이 내가 혼술을 하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워 보였는지 여기 가끔 혼자 술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있느냐, 본인도 직장이 가까우니 가끔 혼자 술을 마시러 와야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술을 마시고 웹툰을 보고 화장실을 몇몇 다녀오고 계산을 한 것 외로는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었다.
바를 빠져나와 밖으로 나오니 다시 추위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올 때보다는 취기가 있어 그나마 견딜만했다.
큰길에 오가는 사람도 없이 바람이 세차게 부니 더욱 춥게 느껴졌다. 호텔까지 얼마나 가야 할지 멀게만 느껴질 때 이자카야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초밥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날이 춥기도 하고 좀 더 마실 요량으로 이자카야로 들어섰다. 다찌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따뜻한 분위기에 이자카야를 둘러보았다.
작지만 사람이 꽤 있는 편이었다. 메뉴판에서 저렴한 사케와 시메사바를 발견하고는 초밥은 포기하고 고등어회와 사케 한팩을 시켰다. 얇게 저며진 고등어 초회와 생강을 생고추냉이에 살짝 찍어 무순과 함께 먹으니 마치 저녁을 먹지 않은 것처럼 식욕이 돌았다.
따뜻한 사케와 고등어 초회를 먹으니 혼자만의 저녁이 완벽하게 완성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옆 테이블의 오니기리를 보고 식욕이 돋아 주문하려 물어보니 메뉴에 없고 단골에게 그저 조금 해준 것뿐이라 주문이 안된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에 메뉴판을 둘러보다 초밥 한판을 더 시킬까 했지만 연어 오차즈케를 시키는 것으로 식욕을 진화시켰다. 오차즈케를 파는 이자카야가 많지 않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따뜻한 찻물에 밥과 오차즈케 고명이 얹어져 짭짤하고 구수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사장님은 어묵 가락국수 조금을 서비스로 주어 이미 부른 배를 부여잡고도 맛있게 먹으며 더욱 취했다.
부른 배로 이자카야를 나서 호텔로 들어오니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혼자라 외로울 수도 있었지만 취기가 올라 서울을 야경을 바라보며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입꼬리와 광대가 내려올 줄 모르고 웃음이 났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 깨끗하고 포근한 공간, 그리고 나를 품어주는 야경이 있었다.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1층 로비에서 브런치를 먹고 샤워를 하고, 음악을 들으니 시간은 금세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내 것이었던 잠자리와 도심 뷰와 눈부신 햇살을 찍고 또 찍으며 그 순간을 아로새기고 싶었다.
체크아웃 후 나는 가까운 서점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책을 사고 팠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베스트셀러 소설과 미라클 모닝 다이어리라는 다이어리류의 자기 개발서를 사 집 근처 카페로 갔다.
밀크티를 마시며 가만히 조용히 책을 읽었다.
아주 오랜만의 독서였다. 시간이 흘러 결국 그 책들은 다시 중고서점으로 흘러갔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책을 사는 것으로 그 순간들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언가 끝난다는 생각보다는 무언가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1박의 시간 동안 나는 이리저리 당겨졌던 고무줄이 놓아지며 다시 제자리로 제모습으로 돌아오듯이 온전한 나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