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내 삶은 엄마 탓이 아니야

2023.6.16.

by 하얀밤


"공무원이 되어라."



제대로 벌이를 못한 아빠 때문에 평생 고생한 엄마는

내가 철들자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다.


나는 다른 직업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고3,

수능을 앞두고

친구들이 대학정보가 담긴 두꺼운 책을 펼쳐보며

어느 대학을 갈까,

어느 과를 갈까

고민하는 모습이 생소했다.


'왜 고민을 하지?

공무원이 되면 그만인데.'


순진했던 건지, 무식했던 건지.

나는 엄마가 키우기 참 쉬운 딸이었다.

(엄마는 절대 아니라 하겠지만)


친구들이 보는 대학정보들을 곁눈질하며

오사카대, 델리대를 꿈꿔보긴 했다.

우리나라에 산다면 공무원이 되어야 했으니까.


여차저차하여

엄마가 자랑하기 좋은 딸이 되었는데

정작 나는 내 직업에 만족하지 못했었다.

'이러려고 OOO 됐나'

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마다

무서웠다.


남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면

오천만 명 중 하나,

딱 그 정도인 것처럼 느껴져

슬펐다.


퇴직, 이직을 할 용기도 없었다.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쌍둥이를 키우기엔

공무원이 그만이었다.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걸 힘들어하는 나에겐

서류싸움이 차라리 나았다.


뭐,

어떤 것이 낫고 아니고를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았다는 게 맞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법이 일어난 거다.

내가 보는 서류들이 친근해 보이고,

내가 하는 일의 큰 그림이 보이고,

전체 조직이 돌아가는 원리가 보이고,

내가 이 조직에서 어떻게 쓰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또 나오는 '만 10년의 원리'.

나에겐 절대적인 원리.

그렇다.

그렇게 되기까지 만 10년이 걸렸다.


직장인 20년 차를 달려가는 지금,

일 하는 게 싫지 않다.

낯설거나 새로운 상황이 닥쳐도

짬으로 어떻게든 해낸다.

짬은 결코 무시 못한다.


이렇게 살다 보니 어느 날,

또 마법이 일어났다.

내 직업이 좋아지기 시작한 거다.


이럴 수가!!

이 직업을 좋아하는 날이 오다니.

아마 나 자신이 가장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얼마 전,

집에 놀러 온 엄마를 태워다 드리면서

"엄마, 나는 내 직업이 좋아."라고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을 하는 날이 오다니.

너무 다행이다.

엄마는 네가 나 때문에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산다고 생각했거든.

정말 다행이다."


우리 엄마처럼 무디고 억센 사람이

할 대사가 아닌데.

엄마도 나이가 드니까 감성적이 되는 걸까.


엄마도 꽤나 자책을 많이 했었나 보다.

엄마의 자책을 줄여줄 수 있어 기뻤다.



'10년의 기적'은

엄마도 나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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