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여행 단상]결국 깨달은 것은 '나란 인간'

2023.8.7.

by 하얀밤


여행 준비를 하며 새삼 느꼈던

우리 나라의 좋은 점들을

여행 중에 하나 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12일간의 서유럽 여행을 통해 느낀

우리나라의 좋은 점들.




#1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


함께 걷던 딸이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엄마, 어떤 아저씨가 나보고 고양이 소리 냈어."


아시아인 여성에게 고양이 소리를 내는 건 인종차별 행위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겹고 추한 짓이었다.

12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인터넷에 사람들이 적어놓은 대로

"Are you a racist?!"나

"멍멍멍멍멍!!!"을 시전했어야 했나.

왜 이런 대응법을 떠올리며 화를 내야 하는 건지.

한국에 살면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인종차별이 '거의'없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에도 부끄러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




#2

금연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유럽에 가서 경악을 한 것은

길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소위 '길빵'을 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있지만

공공의 적을 대하는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유럽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내 코에 담배 연기가 호로록 다 들어와도

얼굴을 찌푸릴 수 있는 분위기가 못 된다.

유모차를 끄는 엄마도 담배를 피우고,

아이 손을 잡은 아빠도 담배를 피우고,

호호 할머니도 허리를 수그린 채 담배를 피운다.

그들의 당당함에 압도되어 담배 냄새에 서서히 익숙해졌다.


여행 후, 우리나라 길에서 간간이 풍기는 담배 냄새에 관대해졌다.

그래, 그래, 숨어서 피는 게 어디야.

이왕이면 금연들 하시면 좋겠지만.




#3

안전하다.


가이드는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갈 때마다 주의를 줬다.


"소매치기가 많습니다.

사진 찍어준다는 사람에게 절대 폰을 주지 마세요.

말 걸어도 대답하지 마세요.

사람 좋아 보여도 말하지 마세요.

팀으로 움직여서 잡아도 이미 다른 놈한테 넘긴 후예요."


보복 여행이라는 뉴스의 말마따나

로마든 파리든 가는 곳마다 인파로 붐볐다.


"요즘은 집시들이 더 세련되게 다녀요.

소매치기도 관광객처럼 꾸미고 가족처럼 보이게 다녀요.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멀쩡해 보이는데

저 중에 누가 소매치기란 말인지.

가방을 앞으로 메고 지퍼를 꼭꼭 잠그며 생각했다.


프랑스 숙소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더 주의를 줬다.

"관광객이 내리는 버스가 습격당한 적이 있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면, 여자와 어린이는 호텔로 빨리 들어가시고

남자분들은 본인 짐 따지지 않고 다 같이 옮깁시다."


이 무슨,

영화도 아니고.

아이들을 양팔에 끼고 호텔로 빠르게 들어가는 내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나라가 너무 그리웠다.




#4

깨끗한 물이 풍부하다.


이탈리아 남부의 100년 된 전통이 가득한 호텔에서

샤워기 필터가 돌아가셨다.

하얗던 필터가 한 달을 꼬박 쓴 것처럼 진한 갈색이 되어버렸다.


필터로도 석회질은 다 안 걸러지는지

머릿카락이 뻣뻣해져 쉽게 엉켰다.


아이들의 피부도 부옇게 일어났다.

물 성분 때문인지, 건조함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안 씻은 애들처럼 허옇게 각질이 생겼다.


식수는 무조건 사 마셔야 했다.

식당에서도 물은 대부분 유료였다.

투어 버스에서 사면 1유로,

마트에서 대량으로 사면 한 병당 1유로 이하,

식당에서 사면 최소 3유로였다.


화장실도 대부분 유료인데다 잘 없어서

물 마시기가 겁이 났다.

더워서 갈증은 나는데 배출하기가 힘드니

목이 타지 않을 만큼만 최소한으로 수분 섭취를 했다.


시원한 삼다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지천에 널린 공중화장실로 당당하게 들어갈 날을 기다렸다.


화장실은 또 얼마나 더러운지.

변기들은 대부분 탱크 한 통이 채워져야 물이 내려가는 방식이어서

여럿이서 연달아 쓰면 말 못 할 민망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면대들마다 물은 찔찔찔.

같이 여행 중인 아주머니가 결국 버럭 하셨다.


"아니, 이 동네는 물에 왜 이렇게 야박해!"


제 말이요.




#5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가이드가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에 참 감사해요.

제가 30년 전 배낭여행을 다닐 때만 해도

KOREA 하면 북한을 먼저 떠올리거나 아예 몰랐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다 알아요.

파리에는 KPOP 아이돌 굿즈샵이 있고요,

우리나라 아이돌 콘서트가 있는 날이면

기차 안이 젊은이들로 붐벼요.

우리나라 위상이 높아져서

제가 밥벌이하기 좋아졌어요."


호호 웃는 가이드 뒤로

싸이가 공연을 한 트로카데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버스 고장으로 계획에 없이 간 슈퍼마켓 점원은

샌드위치 주문을 하는 나에게 또렷한 한국어로 답을 했다.

눈이 동그래진 나에게 웃으며

"한국어 공부하고 있어요.

9월에 한국 여행 갈 거예요."

라고 했다.


이탈리아 폼페이의 외진 마트에서 일하는 그녀는

한국의 어떤 것에 매료되었을까.

그녀의 한국 여행에 좋은 추억이 가득하기를.






이번 여행의 여러 경험들은

하나의 깨달음으로 통한다.


나라는 사람에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여행 내내 우리나라가 그리웠다.

그 어떤 좋은 장소도 작품도

안전과 위생이 따라야 내 눈에 들어온다는 걸 알았다.


배낭 하나를 덜렁 메고

무작정 훌쩍 떠나는 여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하는 게 멋있어 보인다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무작정 따라 하면

오히려 본인에게 힘든 시간이 될 수 있음도 알았다.

(겪어봐야 안다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나보다

더 예민하고

더 불안해하고

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땅에 비행기 바퀴가 닿을 때의 그 안도감.

내 나라, 내 땅에 왔다는 편안함.


나는 아무래도 멀리, 오랫동안 나가 있을 팔자는 못 되는 것 같다.




파리 콩코드 광장에서도, 2030 EXPO 부산에 유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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