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퇴사와 누군가의 이혼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브런치스토리의 메인 화면뿐만 아니라 포털의 메인, 뉴스의 메인을 경쟁하듯 채우는 이 이슈들은 타인의 삶과 일과 결혼에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걸까.
글로 풀어낼 것이 많은 사람들은 속에 응어리가 많은 사람들이다. 하루라도 뭐라도 쓰지 않으면 못 베기는 사람들은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나도 그렇다.
마지막 출근길이라 생각했던 날과 죽음이 가까이 온 듯 뜨거웠던 숨과 아이의 웃는 얼굴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수은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불투명하고 유해한 것이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딱 살 만큼만 내딛을 수 있을 점도의 시간을 손으로 애써 저으며 걸었다.
일도, 결혼 생활도, 삶도 그만둘까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내게 익숙한 삶이 계속되는 것을 선택했다. 이왕이면 선택한 길에서 잘 살고 싶었다. 간절하게 살았던 시간들이 내 삶에 새로운 레이어를 펼쳐 주었다. 어느 길을 선택했든 새로운 레이어가 펼쳐졌으리라 생각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시간들을 사랑한다.
내 눈을 열어준 시간이었다. 고통을 겪어야만 볼 수 있는 세상이었다. 알 수 있는 세상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라고 다 맞는 건 아니지만, 맞는 말도 많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젊어서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것,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등 말이다.
고생, 노력 같은 단어는 얼마나 지루한 단어들인지.
이 단어들은 각자가 품은 고귀한 가치에 비해 어감이 너무 낡았다. 너무 꼰대 같아 반감부터 서게 한다. 어울리는 새로운 단어가 생겼으면 좋겠다. 본래 가치만큼 빛이 나도록.
퇴사, 죽음, 이혼, 병마 등과 싸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길에서 새롭게 눈 뜨기를 기원한다. 그들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빛을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기를 바란다. 비슷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란다.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이미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살아남은 자임을 증명하고 싶다.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싶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그 누군가도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