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2023.9.19.
딸의 눈빛 하나에 내 눈빛도 흔들렸었다. 말 한마디를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때부터, 아이가 음식을 거부한 때부터 엄마인 나에게 비상등이 켜졌다.
딸은 단짝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와 사이가 틀어져 힘들어했다. 상대방 아이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자신의 약점을 꼬투리 잡아 놀린다고 했다. 듣는 나도 화가 났다.
딸에게 힘을 주는 말을 해주려 했다. 세상 일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같은 반 아이라고 다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등등 내가 어릴 적 엄마에게 들었으면 좋았을 말들을 해줬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양볼을 두 손으로 쥐며 엄마의 진심이 전달되게 애썼다.
내 아이의 마음은 어떻게든 다잡을 수 있는 듯했으나, 문제는 상대방 아이의 마음이었다. 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나 행동을 내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상대 아이의 성향을 잘 아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 딸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아는 게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었다.
그래서 과감히 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다.
황상민 박사님의 WPI 심리검사를 이용한 상담소가 마침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상담 예약일 일주일 전 상담 사연을 보내고, WPI 검사도 했다. 상담 사연은 내가 생각하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 입으로 말한 이야기를 받아쓴 것 모두를 담았다.
한 시간의 상담이 끝나고 아이가 상담실에서 나오자 선생님은 나를 부르셨다.
거기서 나는 우주가 뒤집히는 듯한 인식의 전환을 맞이했다.
내 아이가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내가 딸에게 어린 시절의 나를 대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민하고 섬세했던 나는 자라는 동안 억세고 감정이 무딘 엄마에게 위로나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처럼 '예민하고 섬세할' 딸에게 온갖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딸이
그런 섬세하고 예민한 아이가 아니라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따님은 단짝 친구를 만들기보다는 여럿이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게 성향에 맞아요. 엉뚱한 면도 있고 손재주도 있어서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기 쉽지만 본인이 예민하거나 섬세하지 않기 때문에 또래 여자 아이들의 마음을 맞춰주기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딸은 일 대 일의 단짝을 맺은 아이들과 트러블을 겪어 왔다. 딸이 자기랑만 놀아주기를 바랐던 그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려는 딸에게 서운함을 느껴서 수동적인 공격을 했다. 딸만 눈치채게끔 비하하는 말을 하거나, 투명인간처럼 무시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왔다. 아마도 그 아이들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소심하고 예민한 아이들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은 딸에게 반장 같은 걸 시켜보라고 하셨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충격적인 솔루션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였다면 반장이 되면 학교 가기 싫어졌을텐데. 딸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니 자기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따님은 '나를 따르라!' 하는 스타일이에요. 사람들을 앞에서 이끌고 싶어 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타입입니다."
내가 물었다.
"그럼, 제 아이가 저와 같은 성향이 아니라는 거네요?"
"그럼요. 안 그래도 어머니가 쓰신 상담사연과 아이의 입으로 말한 상담사연의 갭이 커서 이게 뭔가 했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날로부터 나에겐 빛이 내렸다.
더 이상 아이의 눈빛 하나와 말 하나, 행동 하나에 크게 흔들리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찾아왔다. 우리 딸은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다른 아이니까 말이다.
아이 또한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서 친구 하나보다는 여럿이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지금은 근 다섯 명의 친구가 있는데 한 친구가 바쁘면 다른 친구와 논다. 그러면서도 누구든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챙겨준다. 자기가 소외를 당해봤기에 그 기분을 알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이의 체면을 세워주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우리 딸이 소위 '가오'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아이가 그런 성향이라고 하니 잘한 건 잘했다고 기분이 붕붕 날아갈 정도로 칭찬하고, 부탁할 게 있으면 엄마와의 의리를 지키도록 유도한다.
아이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지니게 되면서 아이도 나도 한결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느냐면,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오늘도 우리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리고 해결하려 애쓴다.
우리 성향에 맞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