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단상

일부러 맨홀에 빠질 필요는 없다

2023.9.28.

by 하얀밤


요근래 기운이 없다. 에너지의 근원이 상실된 느낌이다.

나만 느끼는 이 위기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기에 내가 해결해야 한다.


이 위기를 넘기면 나는 한 뼘 더 성장할 것이다.


'에너지의 근원이 상실된'이라는 말을 무심코 썼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내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MBTI로 하면 극'I' 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E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만남이 지속되면 '너는 찐'I'야'라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내면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다.


'내면의 에너지'라는 말을 썼다. 내면이란 내 마음을 의미하고, 내 마음은 '내가 믿는 바'를 말한다. 내가 믿는 바로부터 나오는 에너지가 내면의 에너지이다. 지금 나에게 에너지가 소진된 것은 '내가 믿는 바'에 에러메시지가 떴다는 의미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는 내가 직장에서 일을 잘하고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가족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며 가족들 또한 그것을 인정해 준다고 믿고 있다. 또한 주변인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믿고 있다'라는 현재형을 과거형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 위기다.

믿고 있었던 바가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허무함이 에너지 상실의 근원이다.


지금 빨간 불이 들어온 곳은 1. 직장, 2. 가족관계이다.




1. 직장


어느 일터이건 한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스템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에도 있다. 나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편이었다. 내 의견에 따라주는 사람이 있을 때 보람을 느꼈다.


내 의견에 따라 조금씩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런데 최근, 내가 해 온 일이 사상누각처럼 느껴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나 하나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하는 생각은 예상외로 무척 강력했다.


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후부터 밥맛도 없어지고, 모니터 화면도 보기 싫고, 출근도 하기 싫어졌다. 좀비처럼 움직였다. 고장 난 기계 속에서 의미 없이 움직이는 부품처럼 느껴졌다. 이미 고장 난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소진되는 기분은 끔찍했다.


고개를 들어보면, 여전히 나를 지지하고 나보다 앞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계가 고쳐질 수 있을까? 내가 이 기계를 고칠 자격이나 있을까?'하는 의문이 멈추질 않았다.


안정적인 봉급을 받으며 권리란 권리는 다 누리며 '하루'를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힘차게 나아가는 쓸모 있는 기계의 조종석에 올라타 먼 곳을 바라보고 싶다. '삶'을 만족스럽게 살고 싶다.


부정적이기만 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아직도 함께 목소리를 내는 동료를 떠올려 본다. 여전히 그들이 곁에 있다. 한 번은 내가, 한 번은 그들이 발판이 되어 서로를 위로 들어 올려 먼 곳을 보게 한다.


그렇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2. 가족관계


서로 희생했다고 주장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진짜 희생한 자는 누구인가? 전지전능한 신은 각자의 고생량을 세밀하게 미분하고, 오차 없이 적분하여 순위를 가릴 수 있을까?


서로의 공을 인정하고 고마워하면 될 것을, 앞다퉈 내가 더 고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하면 말초적인 분노가 일어난다.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는 피처럼 근원적이고 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태어나면서 정해져 버리는 혈연관계의 사람들과 큰 갈등 없이 지내는 집들을 보면 부럽다. 나는 왜 저런 집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내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나를 지치게 만든다.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의 저자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우젠의 글이 떠오른다.

막 사고가 일어나려는 순간에 시선을 돌려 제 갈길만 쳐다보는 것은 너무 한가로운 짓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다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계속 좋게 지내려면 말입니다.

서로를 지지하지 않는 가족관계에서는 '너무 한가로운 짓'을 해야만 한다.

과거에 얽매이게 하는 관계에서 냉정하게 벗어나 현재로 미래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현학적인 얘기 같지만 실천하기는 간단하다.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된다.

그리고 내 생활을 이어가면 된다.

내가 선택하여 이룬 가족, 내가 선택한 일터에서.




에너지를 억지로 채우기에 앞서 어리석게 에너지를 잃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오랜만에 펼쳐든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책 속의 글을 다시 되새겨 본다.


맨홀에 일부러 발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다.



똑같은 길을 걷는다
그런데 보도에 깊은 맨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본다
또다시 그 속으로 빠진다... 습관적으로
나는 두 눈을 뜨고 있다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안다
이건 내 잘못이다
나는 즉시 빠져나온다

똑같은 길을 걷는다
그런데 보도에 깊은 맨홀이 있다

나는 그것을 피해서 돌아간다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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