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쁜 사람입니까

'왕수펀'의 <처음엔 사소했던 일>을 읽고

by 하얀밤
※ 이 소설은 처음 벌어지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형식이어서, 줄거리를 적은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성악설이 옳은가, 성선설이 옳은가는 일상에서도 자주 떠오르는 의문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악마다 싶을 때 성악설 쪽으로 마음이 기울다가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성장 환경 따위를 들으면 금세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성무성악설이 등장한 건 각양각색의 사람을 하나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결과가 아닐까요.



여기 한 교실이 있습니다.

중1인 아이들이 빼곡히 앉아서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말합니다.


"일본에서 사 온 금색 볼펜이 왜 안 보이지?"


금색 볼펜은 한 남학생의 필통 안에서 발견됩니다. 남학생은 화가 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볼펜 주인에게 볼펜을 주고는 교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립니다.

이때 반장이 나섭니다.


"만약 저 아이가 볼펜을 훔쳤다면 어째서 장물을 필통에 넣었겠어? 다른 사람이 쉽게 발견할 텐데?"


반장이 사용한 '장물'이라는 단어가 아이들의 뇌리에 박힙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평화로워 보이던 교실에 도난사고가 연이어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반에 도둑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자연스레 시선은 볼펜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남학생에게로 향합니다.


소설의 제일 처음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과연 이야기의 '처음'일까요? 책을 갓 읽기 시작한 독자는 '저 남학생이 왜 도둑질을 계속하지?'라고 자연스레 생각하며 남학생이 도둑질을 하게 된 연유가 드러날 것이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를 예상밖의 이야기로 이끌고 갑니다.


먼저, 금색 볼펜은 일본에서 사 온 것이 아니라 불우한 가정사를 숨기며 번듯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아이가 우연히 얻은 볼펜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이 부러웠고, 가족과 여행을 떠나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아이는 점점 낙후된 거주 환경으로 이사를 거듭하며 자신을 거짓으로 꾸미기 시작합니다. 이 학교 아이들이 볼펜을 일본에서 사 온 것으로 믿고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볼펜은 왜 남학생의 필통에 들어간 것일까요?

볼펜 주인을 부러워하던 또 다른 아이가 볼펜을 몰래 만지다가 엉겁결에 가까이 있는 필통에 넣었던 겁니다. 하필 필통의 주인이 자기가 짝사랑하는 남학생인 줄은 몰랐지만요. 남학생이 훔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둑이 있는 것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반장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전학 온 자신과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반장이었거든요.


반장은 왜 근거도 없이 남학생을 도둑으로 몰아갔던 걸까요?

반장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며 철저한 계획하게 양육하는 부모 아래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지능에 맞는 목표 점수를 정해놓고 이에 도달하지 못하면 벌점을 주는 사람이었죠. 반듯해야만 하는 반장의 일상에 불쑥 들어온 전학생은 반장의 '아이다움'을 일깨워줍니다. 반장은 전학생의 짝사랑을 돕기 위해 현란한 어휘력을 구사한 편지를 남학생에게 보내지만 '짜증 난다'는 답변만 받게 됩니다. 반장은 이 사건을 완벽한 자신의 삶에 오점이 생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남학생에게 복수심을 불태우게 됩니다.


남학생에게도 사정이 있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얼굴이 잘생겼다고 어릴 적부터 칭찬을 많이 들어서 본인도 잘생긴 자신의 얼굴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학생들의 짓궂은 장난 같은 고백에는 신물이 나있었죠. 이런 그에게 반장이 요상망측한 편지를 보낸 겁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편지 속 문구에 그가 짜증을 낸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왜 방관하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도 신규 시절엔 의욕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학부모의 도를 넘은 참견과 말썽쟁이 학생들, 과도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반에서 일어나는 도난 사건은 어른이 보기에 이상한 점이 많았기에 선생님은 도둑이 있다고 단정 짓지 말자고 훈화를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 선생님은 나설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눈앞에 채점해야 하는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소설 속엔 반 아이들의 속사정이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책을 덮고 나니 허구의 이야기를 읽은 것인지, 실제 존재하는 교실에 다녀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대만의 한 교실이라지만 우리나라의 것과 너무 닮았습니다.


아이들이 보이는 모습은 단편적인 면만 접하면 소위 '학폭'을 몇 번을 열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친구를 도둑으로 몰고, 모함하고, 이 모든 걸 방관한 아이들은 벌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현실에선 아이들에게 징계를 주고 끝이 나겠죠. 각자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이 책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회를 줍니다.

지루하지 않게, 교실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처럼 보이는 사건의 실마리를 각 인물의 입장에서 개인사를 풀어놓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범인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의 심리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건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상처 많은 인간들이 서로를 할퀴며 벌어진 우연들의 연속이었음을요.

도난사건은 애초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도둑 또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덮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이어, 그들에게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의 원인을 찾아야 그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으니까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건 '나'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눈 질끈 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백 중 하나 정도는 이해되는 부분이 있고, 감정의 소모를 줄일 수 있거든요. 덜 소모된 에너지를 나를 위해 쓸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책 말미에 있는 추천의 글로 갈음합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아니기에 모든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런 소설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라는 거울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며, 사람들의 깊은 속내는 간접적으로나마 정리해 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 왕수펀 <처음엔 사소했던 일> p159, 추천의 글 (by 린즈링, 아동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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