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직장인이 일하고 퇴근하는 법
2023.12.15.
한 가지를 하고 돌아서면 또 일이 있다. 그 일을 하려고 하는데 다른 일이 또 끼어든다. 끼어든 일을 일단 메모해 둔다. 앞서 하던 일을 하는 중에 문제점이 발견된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담당자를 만나러 뛰어간다. 담당자가 부재중이다.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나중에 해야 할 일 리스트에 적어 둔다.
할 일 리스트의 제일 상단에 있는 일을 다시 시작한다. 1년 간 했던 일을 보고하는 일이다. 연초에 하달된 공문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보고 방법이 다양해서 정확하게 봐야 한다. 간단한 형태가 아닌 정식으로 공문으로 보고해야 하는 걸 확인하고 빈공문 양식을 화면에 하나 띄운다. 관련 공문 번호와 날짜를 쓰는데 전화가 온다.
아까 부재중이었던 담당자가 내가 왔다 갔었다는 걸 들었다며 무슨 일인지 묻는다. 쓰던 공문을 임시 저장하며 담당자에게 문제점을 설명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그가 반박을 한다. 기존대로 하면 안 되겠냐고 하는데, 어차피 다시 수정해야 할 게 눈에 뻔히 보여서 설득을 시도해 본다. 못마땅해하는 그에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이건 내 개인일이 아니라고! 나도 쉽게 쉽게 가고 싶어.'
전화를 끊고 임시 저장된 공문을 마저 작성하려는데 내부 메신저에 불이 들어온다. 메신저 보낸 이는 한해의 부서별 일정을 잡고 정리하는 사람이다. 주말, 공휴일만 적힌 2024년 캘린더 같은 표를 첨부파일로 보내며 오늘 중으로, 꼬옥, 퇴근 전까지, 제발 해당 내용을 채워서 보내 달란다. 급해 보인다.
내년 1년의 흐름을 떠올려 본다. 올해와 비슷한 한 해를 보낼 것 같은데. 올해 날짜와 비슷하게 적어보려 하니 요일이 미묘하게 밀리며 비슷한 시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올해와 비슷한 주수의 비슷한 요일에 적어 본다. 혹시나 추가되는 행사가 있나도 생각해 본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놓쳤다가 나중에 다른 행사와 겹쳐서 곤란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걱정만 될 뿐 생각이 안 난다. 퇴근 전에 떠오를까봐 쓰던 걸 저장해 두고 할 일 리스트에 달아놓는다.
할 일 리스트는 자꾸자꾸 길어진다. 하나를 지우면 두 개가 달린다. 연말이라 더 하다. 폰 광고로 자주 뜨는 로얄매치인가 하는 게임 화면이 떠오른다. 통통한 왕이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나면 불이나 물이나 괴물이 왕을 향해 서서히 달려든다. 손을 빠르게 놀리지 않으면 얄짤없이 FAIL이라는 글자가 화면 한가운데 뜬다. 오늘 내 하루가 FAIL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손을 놀리고 또 놀린다.
퇴근 10분 전, 임시 저장해 둔 공문이 생각난다. 헉. 내일 결재자가 출장으로 부재라던데. 오늘 중으로 기안을 하고 가야 한다. 화장실에 가려다가 다시 책상에 앉는다. 지금 필요한 건, 스피드! 타타타닥. 키보드 위에서 손이 춤을 준다. 상신 완료! 퇴근 전에 나는 올렸다. 상신 시간으로 퇴근 전 시간이 찍힌 걸 보니 흐뭇하다.
이제 진짜 퇴근 시간이다. 텀블러에 남은 커피를 비우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아차. 오늘 퇴근 전까지 꼬옥, 제발 해달라던 걸 안 보냈다. 무시하고 그냥 퇴근해 버릴까. 내일 출근하자마자 해서 보내주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답신을 주기만 기다리고 있을 담당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그런 얼굴을 자주 한다. 취합하는 일을 하게 되면 늦게 내는 사람이 그렇게나 밉다.
내 10분을 투자하여 담당자를 웃게 할 수 있다면, 그래, 그걸로 된 거다. 다시 책상에 앉아 아직 시스템 종료하지 않은 컴퓨터 앞에 앉는다. 2024년을 다시 상상해 본다. 무슨 다른 일이 있을까? 내가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은 없을 예정이다. 꼭 해야 할 일만 놓치지 않아도 성공인데. 뭔가 분명히 놓친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담당자에게 파일을 전송한다.
할 일 리스트에서 하나를 지운다. 오늘 못 한 일들은 내일 할 일이 될 것이다. 내일 중으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마도 저 목록들 사이에 혹은 그 아래에 또 할 일들이 주렁주렁 달리겠지. 게임이 별거 있나. 저걸 하나하나 지우는 게 게임이다. 다 한 일을 지울 때의 쾌감이 게임 레벨업 못지않으니.
컴퓨터의 시스템을 종료하며 진짜 퇴근을 준비해 본다. 씻은 텀블러의 물기를 닦는 동안 시스템이 종료될 것이고, 나는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면 된다.
아, 시스템 업데이트가 있었지. 어제 안 하고 껐는데 오늘 다시 뜬다. 오늘 하루도 더 미뤄야겠다. 오늘 하나 내일 하나 뭐가 다르리. 보나 마나 보안패치일텐데 하루 상간에 무서운 바이러스가 들어올 리가 있겠어? 흠흠.시스템 종료를 클릭하며 일어서려는데 원망스러운 손가락이 바로 아래 '업데이트 후 종료' 버튼을 잘못 눌러버렸다.
아.
앉아서, 차분히, 클릭했어야 하는데.
그래!
오늘 업데이트해 놓으면 내일 퇴근이 5분은 빨라질 거야!
라며
화내지 않고
웃어보는 내가
오늘의 승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