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읽고 싶은 필독 도서'

'김애란 <달려라, 아비>'를 읽고

by 하얀밤

얼마 전 우연히 김애란의 소설책을 몇 권 얻었습니다. 잘 알고 지내는 사서 선생님이 학교 도서관의 책을 폐기하게 되었으니 와서 갖고 싶은 책을 가져가라 하셨거든요. 천 권이 넘는 책 앞에서 황홀함과 위압감을 동시에 느끼며 책이 쌓인 골목을 천천히 돌아다녔습니다. 거기서 발견한 책이 김애란의 소설들입니다. <달려라, 아비>, <바깥은 여름>, <두근두근 내 인생>. 이 세 권이 수줍게 손을 내밀길래 덥석 잡았습니다.


김애란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약 십 년 전입니다. 직장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마음이 통하는 동료가 추천해줬습니다. 그녀와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영혼으로 통했습니다.(음... 그녀는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그녀가 좋았습니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 같은,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든든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까르르 웃다가도 어느새 시집으로 빠져드는 매력적인 그녀가 추천해 준 책이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였습니다. 내가 좋아야 책이든 뭐든 보는 제가, 누군가 추천해 준 책을 앞뒤 가리지 않고 읽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을 좋아했다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김애란의 책들을 보며 지금 그녀는 어떻게 지낼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제 상상 속의 그녀는 드넓은 풀 밭에서 시인과 함께 누워 있습니다. 그 옆엔 그녀와 시인을 닮은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뛰어놉니다. 아마도, 그렇게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녀와의 추억을 읽고 싶었는지, 김애란의 글을 읽고 싶었는지, 그 어떤 쪽이든 상관없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아, 글이 팔딱팔딱 뛰어다닙니다. 이게 바로 김애란의 글이었습니다! 죽은 바다에서 마지막 남은 한 마리 살아있는 물고기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반짝이는 비늘이 아름다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손을 뻗어도 뻗은 손의 길이만큼 달아나는, 그런 글이 김애란의 글이었습니다.


10년 전에는 작가의 문체에 홀딱 반했다면, 10년 후에는 작가가 소설 속에 담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반해버렸습니다. 10년 사이 저도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나 봅니다.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달리는 '아비'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마음을, 주인공도 모를 그 마음을, 형용할 수 없지만 터질 것 같은 심정을 마구 갈겨놓은 일기장처럼 써놓은 글들로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 적 없는 '아비'의 다리털까지 상상하는 주인공의 기분이 어떤지 10년 전의 저는 잘 몰랐습니다.


유머러스함 속에 아픔이 묻어나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이야기 하나하나가 제 품에 담기지 않을 만큼 요동쳐서 '이제 그만!'을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끼며 읽었습니다. 추상적인 것을 너무나 참신하게 구체화한 문장은 내 것으로 만들어 나중에 꼭 써보고 싶어서 마음속으로 읊고 또 읊었습니다. 책을 읽고 난 후 고개를 들면 세상의 명도도 채도도 더 높아 보였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팔딱거림이 책 밖으로 나와 제가 있는 세상까지 채색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즈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부풀렸던 두 부분을 다시 옮겨 봅니다.


나는 나의 첫사랑. 나는 내가 읽지 않는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 대화창 앞에서 오줌보를 붙든 채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 그러나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p117


그는 물러서서 벽면을 바라봤다. 자신의 몸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첫 번째 벽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당시 정말 아무 의미가 없거나 사소한 일들이 자기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을 깨닫고 그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p211


'나는 내가 읽지 않는 필독도서'라는 글귀가 펜이 되어 제 가슴에 '너를 써라'는 문장을 새깁니다. 저는 언제나, 저를 읽고 싶습니다. 타인의 글을 읽는 것도 저를 읽고 싶어서입니다. 10년 전의 그녀를 좋아했던 것도 그녀를 통해 저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저는 저를 읽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읽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은 어쩌면 약간의 광기와 집착을 가진 것 같습니다. 흐르는 물 위에서 힘을 풀고 떠다니면 마냥 편한 것을, 굳이 물살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려 고개를 드니까요. 꼬르륵.. 가라앉는 건 흔한 일입니다. 살기 위해선 다시 떠올라야 하니 어푸어푸 발버둥을 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은 오히려 물 위로 날아올랐던 것 같습니다. 주인공들의 헤엄을 내려다보며 나는 어떤 물에 빠져 있는지, 내 위치는 어디쯤인지 너무나 알고 싶어 졌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적어도 한 톨은 교집합을 가지는 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김애란 작가가 유명하다는 것은 작가의 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과 함께 각자의 물살을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싶어 졌습니다. 사실, 언제나 제가 바라 왔던 일이긴 합니다. 저의 바람을 재확인해 준 고마운 책, <달려라, 아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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