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새벽.
잠 기운이 밀려나자 더운 기운이 훅 끼쳐옵니다. 목덜미에서 끈적함이 느껴집니다. 선풍기를 켜려다가 옆에 누운 딸의 이마를 쓸어봅니다. 땀이 없습니다. 어젯밤부터 한기를 호소하던 아이라 걱정이 됩니다.
선풍기를 켜면 딸이 추워할 것 같아서 거실로 나왔습니다. 비 오는 새벽 공기를 품은 거실은 눅눅하긴 해도 방보다 훨씬 시원합니다. 소파에 털썩 누워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지이잉.
5시를 알리는 폰알람 진동이 느껴지자 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폰 옆구리 버튼을 누릅니다. 알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꺼집니다.
지이잉.
5분 뒤 다시 진동이 느껴집니다. 이때부터 마음속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달고 단 잠의 취기에 빠지려는 사람과 이마에 '사즉생(死卽生)'을 새긴 사람이 다툽니다. 주로 후자가 야단을 치는 편입니다.
실컷 야단맞던 전자가 울먹이며 애걸합니다.
"어제 회의만 두 시간을 했어. 집에 오자마자 가방 던져놓고 애들 챙기고 설거지까지 끝내니 밤 9시 30분이었다고. 잠들기 전 양치질하려고 욕실에 갔는데 글쎄, 쌍둥이가 벗어놓은 팬티가 나란히 애벌빨래를 기다리고 있지 뭐야. 로봇청소기에서 떼 낸 걸레까지. 다 끝내고 누우니 10시가 훌쩍 넘었었잖아."
후자가 안쓰러움과 실망이 담긴 눈으로 전자를 바라봅니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그래도 일찍 일어나 홀로 보낸 시간이 나머지 시간들을 너답게 살게 하잖아. 알잖아..
어설프게 살려고 또 죽을 길로 가려고 하네."
쏴아-
때마침 요란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둘의 언쟁이 소나기 소리에 묻힙니다. 물속처럼 말소리가 웅웅 거리고 전자의 어깨를 힘껏 흔들던 후자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허우적거립니다. 그렇게 모두 소나기 같은 잠 기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바스락.
발소리가 잠을 확 달아나게 합니다.
거실에서 누군가 한 걸음 내딛는 모양입니다. 엄마가 옆에 없는 걸 느낀 딸이 자다가 나왔나 싶었습니다. 소파에 누운 엄마를 보면 안심하고 다시 들어가겠지, 들어가는 발소리가 곧 들리겠지 하고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건지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합니다. 너무 더워서 나온 거니 걱정 말고 방에 들어가라고 말하려고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꿈인가?'
다시 눈을 감고 누웠습니다. 머릿속 두 사람이 어느새 깨서 투닥거리고 있습니다. 격해지는 싸움만큼 소나기 소리도 거칠어집니다. 두 사람의 언쟁을 애써 무시하며, 우리 동네 하수구의 배수상태를 걱정해봅니다. 폭우로 출근길 상습 침수 구간에 물이 많이 차 결국 유턴해서 집으로 돌아온 날이 기억납니다. 오늘은 중요한 업무가 있는데..
바스락, 툭.
발소리와 함께 스위치를 건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이번엔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어둠뿐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습니다.
'우리 집이 귀신 나오는 집이었나.'
정체 모를 소리가 나면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서움보다는 의문만 잔뜩 생깁니다. 시선이 부재중 알람 문구가 뜬 폰 화면에 멈추자, 왠지 다 싫어서 눈을 감고 체념 하듯 누워 버렸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툭, 스윽.
이번엔 두 발짝 걷더니 스위치를 만지다가 벽을 쓸어내립니다. 주어를 붙일 수 없는 무언가의 움직임이 눈을 감았는데도 느껴집니다. 이제는 여기가 꿈 속인지 꿈 밖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소나기 소리만 더 선명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둠이, 그 소리가 저를 더 이상 못 누워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즉생'을 이마에 새긴 후자가 꿈 밖으로 나온 걸까요? 아니면, 세례만 받고 3년째 냉담 중인 저에게 하느님이 잠시 왔다간 것일까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는 저를 '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써댔습니다.
육체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잠시라도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지면 그것이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걸 아는 이가 이른 새벽에 쇼를 펼친 것 같습니다. 이 쇼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제 모습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깨울 시간이 되어 책을 덮고, 잠시 동안 아까 그 발소리와 인기척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봅니다. 꿈이라기엔 너무 선명했고, 현실이라기엔 믿기 힘들었던 그 상황은 누가 연출한 것일까요.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쁜 빗줄기가 그 쇼를 연출해 낸 이의 정체가 누구였는지 제 귀에 대고 조잘거립니다. 몽환적이고 공감각적인 배경 속에서 부드럽게 제 등을 떠밀어주고, 저를 주연으로 세워준 연출자가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싸우기만 하던 전자와 후자가 합의 끝에 만들어낸 제3의 솔루션이었던 걸까요?
꽤 섬찟했지만 기특했던 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