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과 '느낌'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봅니다.

독서 모임을 시작하며

by 하얀밤



"안녕? 바빠 보이네."

그녀가 멀찍이서 웃으며 다가옵니다. 작년부터 같은 사무실에 근무한 사람입니다. 작년에는 자리가 멀어서 대화도 자주 하지 못하고 오며 가며 인사만 하곤 했습니다. 올해는 자리가 더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저에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2022년엔 사무실 사람들이 대거 교체되었습니다. 원하는 업무를 맡은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다들 들뜬 숨을 쉬며 서로를 보기보다는 모니터만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저도 부장 자리에 앉게 되면서 긴장과 낯섦, 설렘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끼며, 아니 감정을 느낄 새도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낯선 공문과 낯선 사람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웃음은 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떠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 굵직한 선을 그으며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의 웃음도, 소소한 이야기도, 업무라는 얇은 막이 덧씌워지면서 그조차 하나의 일처럼 느껴졌거든요. 직장을 벗어나야 먹고, 입고, 말하는 것이 저다워진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직장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제 모습을 저의 진실된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가면'이라는 용어에 갇혀 직장인으로, 엄마로 살아가는 제 모습을 거짓이 섞인 연기자의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에만 제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직장인으로서 쌓아온 저의 말들과 행동들과 인간관계도 제 시간이 쌓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로서의 역할도 마찬가지고요. 모두 제가 제 마음을 들여 만든 '진짜' 제 모습이라고요. 이런 믿음을 쌓아가고 있을 때, 그녀가 다가왔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온 그녀와의 웃음과 대화는 무척 즐겁습니다. 왜 지금 저에게 오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녀만의 이유가 있겠지요. 발걸음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변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니까 즉흥적으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는 제게 '책 읽는 인간의 냄새가 난다'라고 했습니다. 음... 책과 독서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책상 구석에 언제나 책을 '얹어' 놓았기 때문일까요? 띠지가 덕지덕지 붙었지만 쉽게 불어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책을 유심히 봤던 걸까요.


그녀가 말한 '인간의 냄새'라는 표현은 그녀와 제가 교집합을 가진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수 천 수만 갈래로 갈라진 감정의 '촉'들 중 꽤 많은 '촉'들이 그녀와 닿아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말 그대로 '느낌'이지만 이 '느낌'이 참 중요하거든요. 몇 달 이상의 시간을 순식간에 점프하여 서로에게 다가가게 해주는 것이 '느낌'입니다.


묵은 '습'이라는 게 끈질겨서 그녀가 한 발짝 다가오면 저는 두 발짝 물러섭니다. 직장에서 왜 이래,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같은 생각들이 자동으로 튀어 오릅니다. 그 생각들을 이성으로 살짝 눌러주며 물러난 만큼 전진해봅니다. 직장이면 어때서, 나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 먼저 다가와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요.


그녀가 독서 모임을 제안했습니다. 저와 그녀, 그리고 '책 읽는 인간의 냄새'가 나는 또 한 명입니다. 올해 우리 층으로 옮겨온 사람인데 그녀가 그 사람을 콕 집어 말하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저도 그 사람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촉'이라는 게 참 신기합니다.


비슷한 '촉'과 '느낌'을 가진 사람이 셋 모였습니다. 쉼 없이 들리는 키보드 소리와 날아다니는 종이, 내선 전화의 울림 속에서 우리는 같은 꿈을 꿔봅니다. 같은 책을 읽어 봅니다. 직장에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마치 사무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듯 어색하지만, 이 어색함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사그라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직장에서의 페르소나에 덧칠을 합니다. 이 색은 저의 천연색과 조금 더 닮아 있습니다. 그들의 색과 저의 색이 독서 모임이라는 팔레트 위에서 어떤 색으로 발할지 기대가 됩니다. 독서 모임이라는 시작은 또 어떤 관계로, 상황으로 이어질까요. 네, 저는 설레나 봅니다. 설렘 속엔 두려움도 있습니다. 설렘과 두려움이라니, 마치 여행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으로 오늘도 출근을 준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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