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공기관에서 일을 한다.
이 직장에 들어오기 위해 젊은 날 부단히도 노력했다.
20대.
갓 직장인이 되었을 시절엔
책, 음악, 여행에 빠져
젊은 날을 보상받아야 한다고 믿고 살면서
업무적인 면에서는 딱 돈 받는 정도로만 했다.
30대.
후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에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면서 긴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휴직 기간을 빼면 30대에 일한 기간이 5년 정도다.
이때부터 정체성에 혼란이 왔던 것 같다
연식으로는 10년이 넘어가는 직장인인데
업무적인 면에서 깊이가 없음을 스스로 알았다.
1년짜리를 10번 한,
1 곱하기 10짜리 사람임을 스스로가 알아서
후배 앞에서 선배 노릇을 하는 것도 우습고
직장 생활도 참 재미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우습게 보는 윗사람과 부딪쳤다.
나, 경력 10년이에요!!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나는,
진짜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시작됐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파편 같았던 지난 시간들이
씨앗 하나하나가 되고
싹이 났다.
'못 하겠어요 라는 말은 하지 말자. 쪽팔린다.'
이 생각은 마법과 같았다.
순식간에 싹이 자라고 열매가 되고 농익었다.
10년 이상 발효된 내 시간들은 탐스러웠다.
파편 같은 시간들이 쓸데없는 게 아니었다.
문서 속 글자 하나,
윗사람과 주고받았던 대화 하나,
졸면서 참석한 회의 중 귓가를 간지럽히던 단어 하나,
하나하나가 값진 경험이었다.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NO라는 말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공공기관 사람, 즉 공무원의 역할은 이런 거라 생각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 크게 잘못된 게 아니면
그냥 따른다.
따져야 할 문제가 있으면 지침을 내린 당사자에게
다이렉트로 질의를 한다.
최대한 정중하게.
그도 윗선이 있어 따르고 있을 테니까.
직장 사람들 중에 윗선의 지시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투덜거리며 왜 해야 하냐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왜 공공기관에 있는지 모르겠다.
사기업으로 가거나, 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하면 되지.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못 한다.
공무원으로서 누리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해야 할 일은 미룬다.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면
공무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인데 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업무 하나하나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내가 꼰대라고 느낀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내 직업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게 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아픈 일도 줄어들어서
병원 갈 일도 거의 없어졌다.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하고
직업인으로서 당당하다.
사족.
이런 점에서 며칠 전 어깻죽지 통증으로 한의원에 간 건 나에게 큰 이슈다.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것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즐거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