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

2023.4.7.

by 하얀밤


나는 공공기관에서 일을 한다.

이 직장에 들어오기 위해 젊은 날 부단히도 노력했다.


20대.

갓 직장인이 되었을 시절엔

책, 음악, 여행에 빠져

젊은 날을 보상받아야 한다고 믿고 살면서

업무적인 면에서는 딱 돈 받는 정도로만 했다.


30대.

후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에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되면서 긴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휴직 기간을 빼면 30대에 일한 기간이 5년 정도다.

이때부터 정체성에 혼란이 왔던 것 같다

연식으로는 10년이 넘어가는 직장인인데

업무적인 면에서 깊이가 없음을 스스로 알았다.

1년짜리를 10번 한,

1 곱하기 10짜리 사람임을 스스로가 알아서

후배 앞에서 선배 노릇을 하는 것도 우습고

직장 생활도 참 재미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우습게 보는 윗사람과 부딪쳤다.

나, 경력 10년이에요!!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나는,

진짜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시작됐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파편 같았던 지난 시간들이

씨앗 하나하나가 되고

싹이 났다.


'못 하겠어요 라는 말은 하지 말자. 쪽팔린다.'

이 생각은 마법과 같았다.

순식간에 싹이 자라고 열매가 되고 농익었다.

10년 이상 발효된 내 시간들은 탐스러웠다.

파편 같은 시간들이 쓸데없는 게 아니었다.

문서 속 글자 하나,

윗사람과 주고받았던 대화 하나,

졸면서 참석한 회의 중 귓가를 간지럽히던 단어 하나,

하나하나가 값진 경험이었다.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NO라는 말을 잘하지 않게 되었다.

공공기관 사람, 즉 공무원의 역할은 이런 거라 생각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 크게 잘못된 게 아니면

그냥 따른다.

따져야 할 문제가 있으면 지침을 내린 당사자에게

다이렉트로 질의를 한다.

최대한 정중하게.

그도 윗선이 있어 따르고 있을 테니까.


직장 사람들 중에 윗선의 지시를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투덜거리며 왜 해야 하냐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왜 공공기관에 있는지 모르겠다.

사기업으로 가거나, 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를 하면 되지.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못 한다.

공무원으로서 누리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해야 할 일은 미룬다.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면

공무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인데 사장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면

업무 하나하나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내가 꼰대라고 느낀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내 직업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게 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아픈 일도 줄어들어서

병원 갈 일도 거의 없어졌다.

나는 내 직업을 사랑하고

직업인으로서 당당하다.




사족.

이런 점에서 며칠 전 어깻죽지 통증으로 한의원에 간 건 나에게 큰 이슈다.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것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즐거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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