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서 다행입니다
멈춤은 기회가 되어야 한다.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한라산을 다녀온 기억이 있다. 체력이 끓어오르는 남학생뿐이었던지라, 선생님께서는 '전교에서 가장 빨리 정상에 도달한 학생에게 선착순으로 선물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냥 두어도 (쓸데없는) 경쟁심에 불타오르는 학생들은 죽을힘을 다해 정상에 올랐다. 나도 최선을 다해 정상까지 올라갔다. 정상에 뛰어오른 학생들 중 한라산의 나무와 꽃, 바람을 느낀 사람은 없었고, 한라산을 다시 올라볼 생각도 사라졌다.
모든 삶의 공통점이 있다면 시간은 쉬는 법이 없고, 끝이 있다는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는 종료지점을 향해 쉬지 않고 걸어간다. 다만 삶의 구간구간을 지나면서 느끼는 속도감이 다르고, 나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현재에 충실하면서 기대하는 미래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삶이 이상적이겠지만, 모든 삶의 순간이 이상적이기는 어렵다. 설정해 둔 목표가 너무 많을 때는 앞만 바라보고 달려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는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고개를 뒤로 돌리고 앞으로 달려가는 꼴인데, 그래서는 모든 순간을 후회로 남기게 될 뿐이다. 이렇게 사람의 시선은 어지럽다. 미래와 과거 사이를 맴도느라 현재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내가 받아야 할 사랑과 내가 주어야 할 사랑은 한없이 미뤄지게 된다. 문득 느껴지는 삶의 속도감에 숨이 차오르는 경우가 많지만 멈추어본 적도 없고, 멈추어도 된다는 확신이 없다.
한편 마치 삶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삶에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 경우가 그렇다.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삶의 동력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대로 멈춰 서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실제로 시간은 멈추어 있지도 않다. 그리고 언젠가 끝은 다가오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멈춤을 기회로 삼는 것이다. 삶의 멈춤이 끝이 아니라 리셋이 되도록 해야 한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계획들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삶을 끝내야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지 필요하다면 삶의 방향만 조금 틀고 다시 나아가면 된다. 오히려 무언가 미심쩍던 인생을 새로 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픔의 경험은 어지럽게 향하던 시선을 현재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삶 속에서 사랑을 표현할 기회가 무한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욱 사랑표현에 열을 올리곤 한다.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사랑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다. 아프고 난 뒤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으나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환자분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한라산을 열심히 오르다가 도저히 체력이 허락하지 않아 바위 위에 주저앉았던 기억이 난다. 그제야 한라산에 핀 분홍색 꽃들과 바람을 느꼈고, 산의 높이별로 달라지는 나무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때 주저앉지 않았더라면 내게 한라산의 기억은 없을 것이다.
내 뜻이었건 내 뜻이 아니었건 삶 속에서 몇 번의 멈춤이 기회가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