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자끄 라깡의 욕망에 대한 고찰
욕구 (need)는 요구 (demand)로 표현된다. 요구는 욕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more) 원한다. 욕망은 이러한 more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자끄 라깡
자끄 라깡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욕망은 곧 필수적이지 않은 요구라고 볼 수 있다. 맥락상 정확하지는 않지만 편하게 표현해 보다면 '불필요한 요구'인 것이다.
생존이라는 욕구를 위하여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생존 가능한 정도의 먹을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요구하는 음식들은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본질상 불필요한 것이라는 점에서 욕망의 표현은 어느 정도의 자기희생과 포기를 전제로 한다. 대체로 욕망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욕망에 빠져든 나머지 필수적인 욕구에 대한 요구마저 포기해 버리고 잠식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대체로'라고 표현한 것은 욕망이 극단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예시가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질병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실제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욕망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이 한 달 남았다는 사람에게는 내년 여름을 위해 헬스를 하고, 하반기에 나올 신상 핸드폰을 사전예약하는 등의 행위가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감상 좋지는 않지만 '욕망'은 그 자체로 무조건 악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저 '필수적이지 않은 사항에 대한 요구'일뿐이다. 사실 '불필요한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류는 발전하고 성숙해 왔다. 필수적인 요구사항만 충족하고 살아가는 아메바와 인류가 다른 점은, 자아실현이라는 욕망이 있다는 점이다. 자아실현의 욕망은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욕구의 의미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몸의 증언>의 저자 아서 프랭크는 질병으로 욕망을 잃게 된 것을 '자아의 소멸'이라고 표현했다. 심각한 질병을 마주한 사람은 자신을 '욕망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격하시킨다.
되짚어가며 생각해 보면 질병에 걸린 사람이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 아서 프랭크는 환자가 자신의 질병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망, 그럼으로써 타인에게 '당신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생산적인 욕망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예시로는 생존보다 더 상위의, 혹은 생존과는 또 다른 맥락인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다. 이 욕망은 생존보다 상위의 (혹은 또 다른) 가치라는 점에서 사실상 욕구의 의미를 능가하는 것이다. 모든 욕망을 상실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힘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