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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감 Mar 20. 2022

매일 명상해야 하는 이유

우주에서부터 지금 여기 나까지

어느 날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에서 한 출연자가 바위에 앉아 명상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편은 '저러고 있을 시간에 나무라도 하나 더 하겠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명상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로서 명상을 게으르고 이상한 짓으로 생각하는 남편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 '당신도 명상해보면 나무 하나 더 하는 것보다 꼭 필요한 시간인걸 알 텐데' 정도 얼버무렸었다. 




우리 삶은 참 바쁘다.


좋은 것 먹고 입고 살기 위해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결국 쇼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이번 주말에 뭘 할지, 매일매일 자라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지, 어떻게 해야 돈을 더 많이 벌지, 어떡하면 건강하게 덜 늙을지, 다음 끼니엔 뭘 먹을지 등등 뒤돌아서면 다시 만나는 질문에 휩싸여 아등바등 참 바쁘다.


호기롭던 어린날 '인간은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걸까?'에  대한 답으로 '정의 내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의를 내렸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아등바등 사는 이유는 인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름의 답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매 선택에 기준이 없고 만족도 없어서 아등바등 바쁘기만 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로서 정의 내림이 중요하다고 것은 정의 내렸지만 모든 일이 쉽게 정의 내려지지가 않았다. 


이게 답인가 싶으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계속해서 복잡한 상황이 펼쳐지며 '이걸 말할까?' 하는 작은 물음 하나도 몸, 마음, 생각, 영, 사랑, 참 나, 자존감, 인류, 지구, 우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답들이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전지 끝없이 핑퐁거렸다. (내가 주의력결핍장애(ADD)를 겪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정의 내리면 중심 잡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생각만 더해지고 실제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잘 먹고 잘 사는 길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다. 멀어지다 멀어지다 원점으로 돌아와서야 정의 내리기는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잠시 머나먼 시공 여행을 떠나보자.


끝없이 펼쳐진 우주에 수 없이 많은 먼지 같은 은하 중 하나인 우리 은하 속에 티끌 같은 태양이 있다. 그 티끌 같은 태양에 기대어 109배 작은 지구가 살아 있다. 우주 티끌의 티끌의 티끌인 지구이지만 우리에겐 그 웅장함을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 그 지구 안에는 수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우리 인간이 살고 있다. 


인간을 우주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우리는 어림잡아 45억만 년이라는 지구 나이에 비해 몇 초에 불과한 30만 년이라는 인류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지구에 비해 별것 아닌 시간이긴 하지만 겨우 100년이나 사는 나로서 여태 살아서 40년이 넘었는데 별 볼 일 없는 30만 년이라는 인류의 시간 역시 너무 까마득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도 안된다.)


인류는 30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슬기롭고 슬기로운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사나운 짐승과 질병과 추위와 더위를 이기며 힘든 삶을 지나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권력과 세력을 다투며 국가를 이루었다. 결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꽃피우고 집단지성을 이용해 지금의 빛나는 문명을 이루어 인류를 이어가고 있다. 


깊고도 깊은 머나먼 우주 속 티끌의 티끌 속에 일궈낸 인류 문명 한가운데에 이 글을 쓰고 또 읽고 있는 우리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빅뱅에서 지금까지의 시공간은 인간에게 가늠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우주 파멸까지도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시공간 속에 우리는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경험하면서 우주를 떠 다니고 있을 뿐이다.



숨만 쉬고 있으면 시간이 흘러 자꾸 지금에 오는 경험을 계속하다 결국 우리는 몸을 내주고 끝없는 우주처럼 사라지는 지금을 맞이 할 것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을 모르듯 우리 역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다시 태어나길, 어딘가 몸이 있는 삶과 닮았지만 고통 없는 삶이 있길, 그냥 몸 없이라도 지구에 의식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지난 우주가 그랬듯 우리의 지금 여기 당연하던 경험과 나름의 성취와 기회들을 자연스럽게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거북하거나 허망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경이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다시없을 귀한 시간을 왜 그렇게 지난 상처를 붙들고 고통에 묶여 살고 있는지, 얼마큼 더 잘 살고 싶어서 덧없이 지나가고 사라질 소중한 경험들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지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바쁜 숨을 돌려 지금을 보는 여유를 찾고 감사함을 느낀다.


비록 의식의 방향을 본능적인 내게 내어주는 순간 또다시 내 아이에게 악악거리고 불만에 휩싸여 매사를 인내하는 느낌으로 바둥거리게 되지만 이런 태도 역시 지금껏 인류가 생존하게 된 합당한 방식일 테니 속 좁다 탓하기보다 그 안의 욕구를 인정하고 행복할 방법을 찾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긴 시간여행을 마치고 결론이다. 



의도적으로 하루 한 번은 명상을 통해 살아있는 나의 호흡과 감각에 온전히 머묾으로 인해 우주 어느 한 곳에 티끌의 티끌의 티끌로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몸, 마음, 정신)를 인식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경험하는 존재인 나, 지금 이대로 우주 자체인 온전한 나를 경험하는 일은 근본과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안도감을 준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긴장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온전함을 더 자주 경험하는 삶이 더 자주 행복하고 더 길게 만족하게 되어 내게 주어진 찰나의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할 힘을 갖게 한다. 


명상을 통해 잡념에 끝없이 휩싸이는 인간적인 나를 인식할 수도 있고 안도감과 마음의 힘을 기를 수도 있다.


우주 먼지로써 누구나 한 번의 기회를 가지고 살고 있다. 내 기회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용서받지 않아도 괜찮고 무언가 업적을 이루지 않아도 괜찮고 세상의 인정에 목메지 않아도 괜찮다는 관용의 자세를 취할 수 있다. 내 기회에 만족하고 경험하고 있음을 알고 주어진 시간에 감사와 경이를 표하며 순간을 스스로 채워가기만 하면 그 감사와 만족이 쌓여 내게 풍족한 경험과 가치로 돌아온다. 


욕심나면 욕심나는 대로 인정하고 한 걸음씩 달려 나갈 수 있고 손해 보면 손해 보는 대로 인정하고 베푸는 마음을 낼 수 있다. 솔직하고 풍요롭고 강한 마음을 가꿀 수 있다. 존재 자체로 괜찮은 나를 인정하는 안정된 마음은 애써 생각을 짜내어 삶을 정의 내리지 않더라도 내가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답을 내어준다. 


이것이 매일 혹은 매 순간 명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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