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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감 Dec 12. 2020

성추행 기억에 대한 다시 쓰기 2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이런 일이 더 이상 없는 것이 더 간절하기에

마흔이 넘은 지금 거의 치유되었지만 그 날의 두려움과 분노를 이만큼 가라 앉히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특히 결혼을 하고 안정을 찾고 많이 치유되었다. 


젊은 날에는 절대 남자를 만날 수 없을것 같고 이 트라우마 속에서 성관계를 할 자신이 없었지만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가정을 꾸리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배우자를 찾아 나설 용기를 주었고 불안한 줄타기 중에 운 좋게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받으며 치유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바라보는 힘을 키우면서 큰 결심이 섰다. 


그건 바로 그 순간을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순전히 나의 안녕을 위해서. 


처음엔 그 나쁜 놈이 미웠고 내게 관심 주지 않고 안전한 보호자가 돼주지 않는 부모님이 미웠다. 아들을 그렇게 키운 큰 엄마도 미웠다. 억울하고 화나고 두려운 나의 상태는 내게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피해만 가득 낳고 있어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 날의 엄마와 큰엄마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그 순간의 개인들을 정면으로 마주 하니 저주스러운 그놈도 불쌍한 면이 있었다. 


나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의 이미지였는데 나이를 헤아려보니 그때 그는 중, 고생이었다. 지금의 눈으로 청소년을 보면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호기롭기도 하고 아름답기도한 간지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그도 그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큰 아빠는 아파서 누워있었고 큰 엄마는 돈 버느라 네 아들 키우는데 마음 쏟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만 인간의 도리, 성교육, 옳고 그름을 가르침 받지 못했고 성적 호기심을 부도덕하게 해결하게 하도록 방치 되었고 나에게 암울한 기억을 남겼다. 


그의 범외에 당위성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그 환경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내가 두려워할 사람이 아니라 유독 어리석어 이웃에 피해를 끼친 사람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용서해 주겠다 마음먹었다. 


비록 그의 눈을보고 내 생각을 전할 만큼 잠재의식 속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지만 반드시 맨살에 소금을 뿌리며 참고 살 필요는없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대중을 향한 글을 통해 세상에 말한다.


'너는 어리석었고 죄를 지어 내게 피해를 주었다. 너의 어리석음과 잘못으로 나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너의 상황을 이해하고 너를 용서한다. 부디 세상의 저주를 받는 일은 멈추고 너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으며 살다 가라.'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를 용서한데도 씻을 수 없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지난 성추행 경험이 씨앗이 되어 자연스럽게 재발되진 않았을까? 또 다른 피해가 생기진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바로 알려주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계속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내 침묵으로 인해 혹시 모를 피해를 막지 못한 괴로움이다. 


다가가 말하기엔 여전히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기 때문에 외면하고 최대한 잊고 싶지만 그래선 안된다는 사명감이 끌어올라 오랜 세월 갈등하다보니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됐다.


내 직면한 범죄는 직접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이 글이 세상에 모래알처럼 스며 있을 다른 피해자와 가해자들에게도 읽히길. 그리고 숨어 있는 수 많은 가해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당신이 약자라고 판단한 그 피해자는 머지 않아 어른이 되고 그리 약하지만은 않아서 당신의 죄의식과 교만을 온 세상에 정나라 하게 알리는 기회로 삼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 한다. 피해자가 약하다는 무지에서 오는 가해를 멈추라고 말이다. 


내게 불쑥 찾아온 작은 용기가 대견하다. 나는 차츰 친척들에게 성추행 사실을 알릴 계획이다. 그가 포함된 작은 사회에 그 죄를 알리고 그래선 안된다고 그에게 전할 것이다. 그에게 형벌을 주느냐 마느냐는 나에게 아무 의미 없다. 내가 더 이상 괴로움을 고이 품지 않고 밖으로 꺼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혹시 모를 또 다른 피해를 막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각오를 하면서도 그에게 성추행 사실이 전달되었을 때 내가 거짓이라고 나를 기만하고 비난하면 마흔이 넘은 내가 그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울기만 하다 그를 향한 내 용서가 사라질까 봐 두렵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 성숙한 어른으로써 담담히 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혹시 담담하지 못해도 사과 받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아름다운 인간 일뿐 한 인간을 개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웃음짓는 신일 필요는 없으니.)


만약 오랜 세월 무너져 내린 그의 인격으로 그의 범행을 막을 수 없다 해도 나로서는 외면하고 사는 것보다 '너 그러면 안된다. 세상에 빛이 될 필요는 없지만 어둠이 되선 안 된다. 너의 고난을 타인의 고통으로 옮기지 말아라.'라고 성숙된 어른으로써 일러주고 싶다. 


단 한 명의 가해자가 아닌 이 세상 곳곳에 살아가고 있는 성추행을 비롯한 성폭력 가해 경험자들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 


만약 반성의 마음이 생겨도 죄의식으로 초조하고 불안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마음 깊은 불안을 없에고 죄를 씻는 방법은 마음 깊이 사죄하고 최선을 다해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 것이 유일하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죽음이 회복이라 하면 그것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죽어도 용서는 안된다. 그러니 잘못에 따른 손가락질과 고난이 있다면 인정하고 그냥 받아내라. 비난 받아도 괜찮다. 


죄의식에 초조하고 불안하게 사는 것보다 잘못을 인정하고 손가락질을 달게 받으며 자기 생존의 이유를 찾고 빚 갚는 마음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나름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 지난 날을 변명하는 에너지를 아껴 너의 앞 날이 빛이 되길 바란다.


과거에는 당신들이 죽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이제 저주를 멈추었다. 당신들도 어디선가는 부디 사랑받는 삶을 살길 바란다. 당신도 아름다운 인간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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