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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다감 Dec 12. 2020

성추행 기억에 대한 다시 쓰기 3

나에게 전한다. 그 일은 멀리서 보면 사실 큰 일도 아니다

성추행 기억에 대한 다시 쓰기는 숨은 가해자들과 숨은 피해자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이면서 사실 나 스스로에게 전하는 격려의 메시지 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아름다운 우주에 아름다운 지구에 아름다운 인간으로 태어나 건강이 주어졌는데 더 이상 두려움과 우울감을 내 것으로 삼을 이유가 없다. 주어진 삶을 누리고 싶다.


인류가 생겨나고 죽는 가운데 두렵고 이해할 수 없는 공포는 가득했다. 


가까운 역사책이나 이야기 책을 살펴보아도 그 옛날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기도 하고 신분 사회에서 핍박받고 갈취당하기 하고 전쟁 통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거나 돌로 때려죽이고 찢어 죽이고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불곰이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힘찬 어미 연어를 신나게 잡아먹기도 하고 어린 가젤을 여럿의 사자가 물어 죽이고 어미와 새끼 할 것 없이 허겁지겁 먹어치우기도 하고 텃밭을 가꾸다 호미질 한 번에 지렁이가 두 동강 나거나 개미집이 와르르 무너져 그 세상에 재앙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성추행 당한 것은 큰 일도 아니다.  


내 기억을 거슬러 보아도 어린 시절부터 성추행 사건 이외에 수 없이 많은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을 경험했다. 많은 다툼과 도전과 성취도 경험했다. 저 건너 신호등은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꺼지고 켜지며 밤낮없이 건널 기회를 준다. 한 시간 수업시간은 너무 긴 것 같지만 지구는 달과 함께 태양을 돌며  낮과 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수 억 번도 더 만들어 냈다. 지구에 살면서 이렇게 광범위하고 빈번하고 다채로운  사건 중에 그 일 하나 그 순간 하나가 내 삶의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은 너무 큰 낭패 아닐까? 수억 명의 인간 중에 단 한 번의 생명을 부여받고 살면서 그 하나의 사건에 포커스를 두고 괴로워하는 건 너무 어리석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살기엔 너무 소중한 인간이다.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억울하고 슬픈 일일 뿐이다. 억울한 감정을 드러내고 슬픔을 애도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 번뿐인 내 삶에서 성폭력 상황에 그 이상의 의미를 주기엔 너무 하찮다. 


더욱이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남겼을 어떤 종류의 상처를 지금껏 잊고 살고 있는 것처럼 그 일도 그렇게 잊을 수 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어떤 종류이건, 두려운 순간을 겪는다. 나도 어떤 두려움을 겪은 것이다. 더한 두려움을 경험한 이들도 많지만 그들에 비추어 내가 아무 일도 아닌 것도 아니고 내 두려움이 더 크다고 해서 세상의 중심에 설 일도 아니다. 단지 누구나 두려운 순간을 겪을 수 있고  나도 겪었을 뿐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자신의 어려움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자신이 겪은 나름의 고난을 성숙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세상에 오물을 투척하는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물을 던지는 순간 나 또한 다른 이의 오물을 받아내는 쓰레기 통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기억해야 한다. 


누구라도 어느 순간 어떻게 괴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난날에 큰 범죄를 저질렀건 아무 잘못 없이 살았든 간에 누구라도 고난을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함을 기억해야 한다. 성숙하지 못하면 한 번뿐인 인생이 똥 냄새 속에 사그러 들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미 큰 잘못을 했다면 그때 다르게 행동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책임질 것이 있다면  책임지면 된다. 그것이 쓰레기통을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에게 전한다.


성범죄 순간 내 나약함을 인정한다. 그를 응징하지 못한 억울함을 인정한다. 두려움을 알리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고 속앓이 했던 외로움과 괴로움을 인정한다. 충분히 힘들었으니 지나 보내주자. 지난날 나에게 의미 없이 지나간 수없이 많은 시간 중에 하나로 흘려보내자.


 '엄마, 무서워! 도와줘!' '싫어. 그만해'  '나 다 기억해. 너무 화가 나고 네가 불쾌해. 아무렇지 않은 척 얼쩡거리지 마' '네가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겠어'


그날 했어야 하는 말 그리고 성장하며 그에게 하고 싶던 말들이 무엇이었을까 찾아보니 당황스러울 만큼 정말 대단한 말도 아니다. 저 단순한 말을 왜 못 했을까! 지금 그의 눈을 보고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남아있긴 하지만 했다고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혹은 더 큰 상처만 남겼을지도 모른다. 


비록 작은 한 마디이지만 저 말을 지금 여기서 내뱉으면서 그 날에 꽂아 두었던 깊이 박힌 깃발을  뽑아낸다.


그리고  유년의  해맑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담긴 내 사진 한 장을 기억 속에서 꺼내 올려 유년의 기억 포인트로 삼고 기꺼이 그곳에 깃발을 꼽는다. 사진 속의 아름다움처럼 나의 유년은 기분 좋게 기억된다. 


나는 사랑스럽고 안전하다. 나는 매사에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불편하면 언제라도 거부하고 처단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온 세상이 나를 돕는다. 



이번 글쓰기로써 나는  내 아이가 성추행당할까 막연하게 두려워하면서 매사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서 침묵, 외면, 고립감을 익숙하게 여기는 암울한 엄마 역을 벗어던졌다. 내 아이가 싫을 때 싫다고 말하고 좋을 때 좋다고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 자기 삶에 도움되지 않는 좌절은 스르륵 흘려버리고 다음 걸음에 희망을 심는  솔직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있도록 모범이 되는 맑고 자신감 있는 엄마가 되었다.  


고난의 시절을 무사히 지나와서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어른이 된 것 그리고 성숙된 인간이 될 수 있는 엄마가 된 것에 감사하다. 


글을 쓰는 오늘을 맞이한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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