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놀아 주기 싫단 말이야.
"엄마, 영상 보면 안 돼? 심심해."
큰 애가 이렇게 말하면 갑자기 숨이 콱 막힌다. '심심하다는데 어떡하지?' 나에게는 저 아이를 안 심심하게 해 줄 다른 방법이 없다. 더욱이 아이와 놀고 싶지 않으니 당혹스러움이 밀려와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지른다.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그래. 저 많은 장난감은 가져다 버릴까? 심심하면 어지러 놓은 옷이랑 장난감 치우던지 엄마 살림하는 거 돕던지 영상 타령 좀 그만해!"
심심하다는 한 마디에 아이는 오만 짜증을 다 받아내야 했다. 그래도 아이 입장에서는 받을만하다. 왜냐하면 결국은 엄마가 혼자 짜증 내다 말고 자포자기하듯 '그럼, 잠깐 보고 엄마가 끄라고 하면 바로 꺼'라고 하며 화면을 건네 줄게 뻔하기 때문이다.
심심하다는 말은 왜 엄마를 일순간에 자극하고 쉽게 무장해제시키는 걸까?
육아 책에 보면 아이가 심심할 때 창의력이 생겨나고 주도적인 놀이가 시작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의 무기력과 불만이 심한 것은 모든 면에서 부족함 없이 제공되는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심심함이 아이에게 좋은 기회라는 걸 알았을 때는 오아시스처럼 반가웠지만 그렇다고 일상에서 이전과 다를 건 없었다.
배웠으니 써먹자! 심심함을 좋게 받아들이기 위해 심심하다는 말이 왜 나를 화나게 하는지 바라봤다. 그 말에 숨은 부정적 감정을 알아내 소멸시키고 싶었다.
먼저 떠오른 감정은 책임감이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책임감. 그런데 잘 키운다는 것이 '아이가 안정적이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엄청 아프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이 상태는 아마도 엄마 역할이 수월해 지기 때문에 꼭 사수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됐다.
도대체 어떻게 멀쩡한 보통의 아이가 엄마의 요구 한 마디로 들끓는 호기심을 잠재우고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고요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게도 아이가 고요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다 보니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아이를 사나운 눈빛, 언짢은 언성, 때릴 수도 있다는 제스처를 통해 제압해서 고요한 상태를 쉽게 만들고는 가증스럽게 '아이가 내 말을 잘 듣는다', '아이가 산만하지 않고 성숙하다'라며 잘 키우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아이 반발이 심해져 '엄마 뜻에서의 아이 잘 키우는 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엄마는 더 무시무시하게 험한 분위기 만들고는 '나는 아이를 잘 키우려고 속 썩이며 이렇게 힘들게 책임을 다하고 있다'라고 자위한다.
전제가 비 현실적인데 책임감의 틀을 씌어놓고 악을 쓰던 노력을 스스로 바라보니 좀 부끄러웠다. 아이를 상대로 제압하고 뜻대로 이끌려는 노력이 너무 과해서 무릎밖에 안 오는 물인지 모르고 죽겠다고 허우적거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이가 심심하다고 할 때 화가 나는 두 번째 숨은 감정은 고단 함이었다. 워킹맘이거나 신생아를 키울 때처럼 엄마의 24시간을 요구하는 때가 아니어도 엄마는 충분히 고단하다.
뇌 과학으로 보면 신체 에너지의 20%를 쓰는 뇌는 잡념을 하게 되면 몰입하는 것보다 에너지 손실이 크다고 한다. 전업 주부는 성과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일상을 동시 다발적으로 케어해야 하기 때문에 잡념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옆에서 숨만 쉬어도 당이 당긴다. 그래서인지 워킹맘들은 월요일 출근을 쉬는 날을 맞는 듯 홀가분하게 여기기도 하고 주말에나 잠깐 아이와 노는 아빠는 주말에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라며 얼굴이 굳어져 돌아 눕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폭넓은 대인관계가 줄어들고 생활이 반복적이고 작은 이슈에 집중하게 되니 차츰 세계관도 좁아진다. 점점 더 세심해지기 때문에 동일한 스트레스에도 취약해진다. 이런 상태에서 아이와의 놀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단적인 고단함을 느끼게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린아이는 장난에 꽂히면 멈추지 않고 계속 반복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는 성인이고 지적인 나에게 내가 할 말까지 모두 정해준다. 정리되지 않고 반복되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다가 엄마가 집중을 못한다 싶으면 내 몸에 올라타고 매달리고 끌어당기며 희희낙락 즐겁게 논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감당하는 마음으로 버틸 수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이제 그만, 그만하자, 응, 그만 좀 하라고!'라며 돌변하게 된다.
그 뒤는 뻔하다. 지적할 것들과 짜증을 있는 데로 끌어 모아 잔소리 공격으로 아이를 몰아쳐야 재미없는 놀이에서 탈출한다. 신체적 정신적 고단함이 뒤 엉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침대나 화장실로 숨기도 하지만 아이는 배 위에 올라타거나 화장실 문까지 벌컥 열고 들어와 내 위에 자리를 잡는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상태의 엄마에게 아이와의 놀이는 특별히 더 고단할 수밖에 없다. 아이가 같이 놀자는 느낌만 표현해도 뇌가 정지하는 것 같고 두려움에 숨이 얕아진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심심하다고 할 때 드는 숨은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아이가 심심할 때 뭘 하면 좋을지 모른다. 엄마가 바라보고 같이 호응하고 놀아주면 되는 것은 알지만 블록을 해도 그림을 그려도 책을 읽어도 옆에서 엄마가 직접 상호 작용해주는 것 말고 아이 혼자 안 심심해지는 방법은 모른다.
막막한 느낌을 표현하자면 바지를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마빡을 치며 무대를 뛰어다니면 되는 걸 알지만 그거 말고 좀 더 폼나는 걸 하고 싶은 장기자랑 무대 위에 선 새 하얀 느낌 같다.
그런데 새 하얀 막막함을 유발하는 데는 나의 욕심이 한몫했다. 만사에 주도권을 쥐고 싶은 엄마 욕심 말이다. 어떻게 되든 아이들이 알아서 하도록 주도권을 줘버리면 아이도 어떻게든 심심함을 해결하련만 싸우지 마, 뛰지 마, 던지지 마, 소리 지르지 마, 가져와, 가져가, 올려놔, 내려놔, 누가 그랬어, 하지 말랬지 등등등.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쥐고 놀이를 판정 내리고 좌지 우지 하고 지시 내리는 태도 때문에 아이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나에게 더욱 의지하고 매달리고 요구하게 됐다고 보였다. 나 스스로 막막함을 가중시킨 것이다.
아이의 심심함은 엄마가 짜증 낼 일도 책임질 일도 아니라고 결정지었다.
영상 건네며 '내 명령만 잘 따르라' 윽박지르고 아이 세계관을 좁힐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분 좋을 때는 상전 수발드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다가 갑자기 뚜껑 열려 '에라이 못해 먹겠네' 행주 집어던지고 신경질 내면 안된다. 애초부터 넓은 의미에서 되는 것 안 되는 것 냉철하게 지키고 거리감 있게 처신해야 감정 상하지 않고 아이의 심심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의 숨통을 막고 하나에서 열까지 지시하고 책임지려다 고단해지고 막막해져 폭군으로 돌변해서는 엄한 아이만 구제불능, 한심한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실수는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아이의 심심함은 아이 것이고 아이 행동도 아이 것이다.
'응, 심심하구나. 심심해도 괜찮아. 가만있어도 돼. 엄마 일 도와도 좋고 네 방을 마음대로 해도 좋아. 치울 때 도와줄게. 영상은 보기로 한 때 볼 수 있어.'
나의 부정 감정만 잘 다스린다면 아이의 심심함은 아이가 헤쳐나가 흥미도 발견하고 자기 기발함에 감격할 수 있는 순간을 맞게 될지 모른다. 아이와 나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고 편안함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색한 말투 뒤에 따르는 닭살을 잠재우면서라도 기꺼이 도전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