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
어릴 때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배움이 느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걸음속도, 글씨를 쓰는 속도가 느렸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런 내게 항상 빨리빨리를 외쳤다.
소근육 발달을 위해 구불구불 선, 뾰족뾰족 선, 동글뱅이 선을 그리는 학습지를 시키셨던 것 같은데
항상 잘 못한다고 혼났던 기억도 있다.
엄마가 내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명확한 장면이 떠오르진 않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내가 노래를 잘 못하는 아이라고 여겼다.
노래를 잘하는 아빠와 친가 친척들에 비해 엄마는 음치여서 본인의 노랫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꺼려했다.
나도 엄마를 닮은 줄 알고 살았다.
다리가 짧은 것도 어깨가 넓은 것도 흠이었다.
외모 평가를 많이 하는 외할머니에게서는 얼굴이 까무잡잡하다는 것, 발이 못생겼다는 것도 흠이라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로 자라 왔다.
사실 내 자식을 잘 키워보려고 온갖 육아서적을 보고 육아 관련 영상을 찾아보며 아이의 문제 행동의 원인은 부모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라는 것도.
관점의 전환.
일단 나는 노래를 꽤 잘하는 편이다. 요샌 실력이 많이 줄었지만 한때는
이수영, 태연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소리도 꽤나 들었다.
느린 건 맞다. 느림을 인정하니 불안이 조금 줄어든다.
어린 시절 진짜 많은 구박을 받아서 정말 손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더 느리기도 하고
자신감이 일단 많이 떨어진다.
대신 내 딸에게는 아가 때부터 색연필을 손에 쥐어줬다.
이유식을 얼마나 흘리든 스스로 먹을 수 있게 기다려 주었다.
지금은 친구들 사이에서 그림 잘 그리는 친구로 불리고
나는 아이에게 커서 디즈니에 입사하라고 무의식에 주입하는 중.
또한 느림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이 아이에게 비칠 때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다.
아이에겐 빨리를 외치지 않는다. 정확하게 성실하게를 알려주려 애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가 때부터 지금까지도 육아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다.
나보다 9살이 많은 아이 친구의 엄마가 존경스럽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
그럼에도 부모로부터 받은, 습득된 것이 부족한 탓에 한계를 많이 느끼기도 하지만..
책을 던져주는 부모가 아니라 함께 공부하고 읽어주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는 여전히 내가 읽어주는 일명 '베드타임 스토리 타임'을 너무 좋아한다.
남편도 인정한 재미있게 읽어주는 실력이 있다.
멍청해서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기에 베푸는 사람이 된 것에 감사한다. 매 주일 목사님의 기도 중 일부가 바로 '남에게 꾸는 삶이 아니라 베푸는 삶 살게 해 주시고..'인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이제야 이해를 한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육아방식이 옳지는 않지만 어떤 부모도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것도 알고
엄마는 그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이해한다.
다행인 것은, 나에게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나는 그로 인해 내가 받은 상처나 콤플렉스를 모른 체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 매일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