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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작가 Feb 06. 2022

할아버지


7살 때까지 나는 11식구와 함께 살았다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큰엄마, 큰아빠, 큰오빠, 언니, 작은오빠

우리집에는 세들어사는 집이 몇 집 더 있었고

우리집에서 왼쪽으로 가면 작은할머니네가

앞집에는 친척집

그 뒷집도 친척집

온 동네는 아빠 친구들


엄마는 나를 두고 돈을 벌러나갔기 때문에

나는 엄마와 있었던 기억보다

언니 오빠들이나 할아버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가

뛰어놀았던 기억이 더 많다

사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돈을 벌러나가서

나를 돌봐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도, 가족 친척들 동네에서 큰 사랑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엄마에게 매달리거나 엄마가 없어서 운 적은 없었다

엄마를 안 찾았다

 

5살 때 혼자 만화를 보다가

만화가 끝나면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놀다가 들어왔다

동네가 작아서 그렇게 놀아도

다 친척집 아빠 친구들이라 안전했고

나에겐 참 편안한 동네였다


그러다 7살에 다른 동네로 이사와

엄마아빠는 돈 벌러다니고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했을 때

나는 참 힘들었다

내가 9살에 나를 참 많이 예뻐해줬던

할아버지가 수박을 사들고

우리 학교까지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집에 수박을 놓고는

도로 가셨는데

그러다 3년 후,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 때 나는 윗이빨이 몽땅 빠지는 꿈도 꾸고

가위도 눌렸었다

할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30분을 울었다


6.25전쟁 이후, 증조할아버지는 짚신을 만드셨고

그때는 전쟁 직후라 아주 가난했다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떡장사를 해서

자수성가로 땅을 많이 사셨고

내가 태어났을 땐 집에 운전기사가 있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한 푼도 받지 않으셨지만

할아버지가 내가 태어났을 때 슈퍼마켓을 내주셨는데 엄마가 도로 들고 들어갔다고 한다

덕분에 엄마아빠는 엄청 고생하며 사셨다

왜 슈퍼하지. 편하게 살았을 텐데

지금도 나는 엄마를 이해 못할 때가 있다

엄마 때문에 나는 가난을 경험하며 외롭고 혹독하게 커야했고 자수성가해야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다

친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고

하반신마비가 되었다

서울 대학병원 소아과 산부인과에서 간호사였던 엄마는 시집 와서 할머니를 극진히 돌봐드렸는데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7살 때였나 돌아가신 후 이사를 한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매일 아침마다 나에게

할머니 세숫물을 뜨라고 시켰는데

나는 매일 할머니 세숫물을 떠다드리고

사탕을 받고는 했다

그 덕분에 7살에 이가 시꺼매져서

유치원에서 놀러가 사진을 찍으면

이를 보여주지 않고 웃었다

새 이가 날 때는 다시는 사탕을 안 먹었다

근데 5살 때 한 번은

엄마는 왜 나만 시키냐고

소리지르며 애들이랑 놀려고 밖으로 나가는데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계시고

엄마가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며

너무 미안하다 느꼈는데

밖에 나가서 한창을 놀고

다음날부터 또 세숫물을 떠다드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5살에게 매일 세숫물 뜨기를 시킨 엄마도

참 내게 너무 많은 걸 바랬던 것 같다

5살이잖아


어쨌든 우리집에는 커다란 강아지와 토끼도

살았는데

하루는 엄마가 집앞에서 풀을 뜯었다며

풀을 뜯어왔는데

그 풀을 먹고 토끼가 다 죽어서

엄청 울었다

그 풀에 농약을 누가 뿌렸던 거다

나는 토끼를 엄청 아끼고 좋아했었다

그 뒤로 나는 동물은 다시는 키우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나를 엄청 아껴주고 사랑해준

우리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날이다

할아버지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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