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성경 말씀과 강론 말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더욱 성대한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끓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오 2,13-18)
A voice was heard in Ramah,
sobbing and loud lamentation;
Rachel weeping for her children,
and she would not be consoled,
since they were no more.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빛이시며 어둠이 없으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산다는 것은 빛 속에 산다는 뜻이다. 빛 속에서 사는 이들은 어둠의 길을 걷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주신다(제1독서). 권력을 잃을까 불안해진 헤로데는 메시아 탄생에 즈음하여 예수님을 없애려 하였고, 박사들이 그를 속인 것을 알고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권력욕에 숨어 있는 악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복음).
헤로데는 자신의 가문만이 영원한 왕족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참된 왕을 살해하려고 그 또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백성의 억울한 하소연도 깡그리 묵살해 버립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의 특징은 간교하고 잔인합니다. 불안한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잔인한 죄를 저지릅니다. 이런 헤로데의 그림자를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이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권력을 지금 현재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그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권력은 기껏 해봐야 몇 십 년 밖에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아주 못된 사람으로 평가될 뿐입니다.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오늘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본기도-
갑작스럽게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랄 일이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그 어린 아이들의 영혼을 당신 사랑의 품 안에 거두시어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사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죄가 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혹 있다고 해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헤로데의 욕망,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지닌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 그런 억울하고,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생겨서는 안 되는 그런 부당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헤로데는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이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안락을 놓칠까 봐서. 그래서 이 안락을 위해 다 죽여 그랬죠.
"예수님 때문에 당한 눈물과 고통은 다 쓸모가 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을 하느님께서 쓰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또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병든 사람을 고쳐준 죄입니까?
가난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과 어울린 죄입니까?
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입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그 당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저 아이가 죄가 많아서 저런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니다.
저 아이는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속죄하는 것이다.
내 고통을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착한 사람들의 눈물,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이
세상을 버티게 하는 기둥입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치유가 약속된 속죄입니다.
회개는 속죄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든 가야 합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좌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이고, 현실에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다른 한 사람’이 자리하기까지는 얼마나 긴 드라마가 엮어지는지 모릅니다. 객관적으로는 그저 그런 사이인 듯 보여도 본인들에게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있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하지 말고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지도 말고 원치 않는 삶을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
죽음에 의해 죽임 당하지 않고 스스로 죽는 겁니다.
곧 자유와 사랑입니다.
사랑과 자유가 삶이든 죽음이든 그것을 의미 있게 하고
이 세상 삶과 죽음의 유한성을 넘어 영원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이때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발생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자유의 하느님이 내 삶과 죽음에서 발생하면
이제 나는 스스로 곧 사랑과 자유로 하느님께 복종합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 곧 사랑에 평안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죽음으로 다가오건,
하느님의 거대한 뜻이 폭력으로 다가오건,
그것을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고 내맡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대한 뜻을 거스르는 폭력과 불의에 대해서는
또한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대적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는 어떠한 경우건 평안히 죽을 수 있지만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곧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나 순교할 수 있기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에 희망해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절대 권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하고’ ‘힘없고’ ‘어쩔 수 없는’ 그 모습,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전능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영원히 외치네.
주님, 영광 받으소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입당송
하느님을 거슬러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이고 마는
파라오와 헤로데의 비겁함을 과감히 던져버려야 할 것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시작과 끝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또 한 사람의 목동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