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나의 세례명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프란치스카이다.
프란치스코는 개심, 겸허, 청빈한 생활에 들어가
회심하여 모든 재산을 버리고 이웃 사랑에 헌신한 카톨릭 성인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인생을 바친 분으로
제2의 예수님을 닮은 분으로 불리기도 한다.
별칭은 하느님의 은유시인, 가난한 이들의 친구,
상징물은 비둘기, 오상,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십자가, 해골 등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의복상의 아들로 태어나
워낙 집이 부유하여 향락을 추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하고,
방랑했으나,
10대 때 기사를 꿈꾸며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힌다.
그 후 1년 간 감옥에 갇혔고, 풀려나온 뒤로 큰 병을 앓는다.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지다 회복한 프란치스코는 이때부터
점점 친구들과 노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고, 목소리를 듣는다.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고, 한 여인이 그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다. 장비들은 너의 병사들을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다시금 기사가 되길 원하던 그는 1205년, 계속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풀리아로 가던 중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아시시로 돌아간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아시시의 동굴을 찾아가 묵상에 전념하곤 했다. 그러던 중 근방의 나환자촌에서 비참한 모습의 나환자를 본 프란치스코는, 피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즉각 그 나환자를 안아주고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발견하여 그 안에 들어갔다. 거기서 기도하던 도중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는 음성을 들은 그는, 무너져가는 교회가 이 무너져가는 다미아노 성당인 줄 착각하고[8] 그 길로 자기가 가진 돈과 아버지의 가게 물건을 일부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하였다. 다미아노 성당을 지키고 있던 늙은 신부는 그 돈을 거절했으나, 프란치스코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결국 성당 수리를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위해 아버지의 가게까지 탈탈 털어(…)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틈만 나면 성당을 지을 벽돌을 구걸(…)하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아버지는 격분했다. 아버지는 협박도 하고 얼러도 보고 아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아들의 상속권까지 빼앗으려 시의 승정원에 재판을 의뢰하는데,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돈주머니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군중 앞에 당당하게 고백한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광경을 지켜본 모두가 프란치스코를 미친 자로 보았지만, 하나둘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청년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아시시의 주교는 알몸이 된 프란치스코에게 농부의 망토를 걸쳐주고 십자가를 걸어주었다. 그는 다시 나환자들을 돕다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온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프란치스코는 마태오 복음서 10장의 말씀[9]을 듣다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성소(聖召)[10]를 발견하고 그 복음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여행길엔 몸에 걸친 옷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는 신조였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야산을 전전하던 프란치스코는 동료 11명과 함께 '작은 형제들'(프란치스칸 1회)을 조직한다. 작은 수도회칙까지 정한 이 조직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인가를 요청했고 마찰 끝에 인준을 받았다. 이때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할 때 꾸었던 꿈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즉 한 수도자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 건물을 그의 어깨로 떠받치면서 무너지는 것을 겨우 막고 있었던 것이다.[11] 이 조직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에 있는[12] 허름한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성당에 본부를 두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13]
그 손길이 이슬람 세력에까지 미칠 무렵, 18세에 혼인을 앞둔 백작의 딸 글라라가 몰래 찾아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뜻을 밝히고 수도복을 입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는 남자 수도회였기 때문에 일단 근방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피신시킨 후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부모가 글라라를 데려가려 찾아오기도 하고, 15세가 된 여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 수도복을 입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따로 꾸리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한 부인회'이며 지금의 글라라회(프란치스칸 2회)이다.
그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선교 활동을 하러 모로코 등지로 가려 했지만 스페인을 떠나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 되돌아왔다. 그 뒤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마침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격한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일루미나토 수사와 더불어 당당히 붙잡혀,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술탄 알 카밀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고, 술탄은 정말 그것이 실현된다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올 혼란이 염려되어 거절했다. 대신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이 든 술탄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 달라는 뜻에서 값나가는 선물들을 보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리고 나왔다.[14]
자신이 선교 활동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거두어들였던 형제들을 튀니지, 그리스, 프랑스, 모로코 등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로코에 파견된 5명의 작은형제회 수사(修士)들은 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순교자(franciscan protomartyrs[15])로 유명하다. 원래는 비탈레 수사가 이끄는 6명이 파견되었는데, 비탈레 수사가 아라곤에서 병이 나서 가지 못하게 되자 성 베라르도 신부가 나머지 4명, 즉 성 피에트로, 성 아주토, 성 아쿠르시오, 성 오토네를 이끌고 세비야로 가 모스크 근처에서 설교하다 잡혀 모로코로 끌려갔다. 아부 야곱이란 이름을 지닌 모로코의 왕 '미라몰린'은 기독교에 유화적[16]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석방시켜 그 지역의 기독교인인 '돔 페드로'의 집에서 살게 했다. 리더인 베라르도 신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랍어를 배워 근처에서 설교했다. 나머지 4명은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다.
지나가다 이를 본 미라몰린은 돔 페드로를 시켜 5명을 아시시로 다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귀향하던 5명은 다시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돌아가 설교하다 또 붙잡힌다. 미라몰린은 이번엔 체우타로 쫓아보냈지만 다시 마라케시로 돌아왔다. 돔 페드로는 베라르도 신부 일행에게 마라케시에 사는 기독교인들한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고지식한 수사들은 그런 거 모른다. 결국 이슬람의 안식일에까지 거리로 나와 설교하던 베라르도 신부 일행은 그날따라 운도 나쁘게 미라몰린의 매의 눈에 포착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미라몰린은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심문한 뒤, 수사들의 맹랑한 대꾸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시미터를 뽑아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 때가 1220년 1월 16일이고, 이 날이 성 베라르도를 비롯한 수사 5명의 축일이다. 이들의 시신을 돔 페드로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로 운구했다. 그들의 장례 미사에 참례한 성 십자가 수도회의 수사 페르난도는 이 때 자신도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페르난도가 가톨릭 성인 중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다.
또한 이들의 순교 7년 후인 1227년에는 성 다니엘이 이끄는 7명의 수사, 즉 성 사무엘레, 성 안젤로, 성 레오, 성 돔노, 성 니콜로, 성 우골리노가 모로코의 체우타로 갔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순교한다. 이들의 축일은 10월 10일. 어쨌든 결국 이슬람 지역 선교 활동은 2번이나 실패한 모로코 선교활동을 비롯하여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가 40세가 될 무렵, 작은형제회는 3천 명이 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 하자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존 회칙을 재정비했다. 약간 완화된 회칙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인가를 받아 쐐기를 박았다. 그는 수도회 장상직을 사임한 후, 다시 소수 동료들만 데리고 라베르나산으로 떠나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성 십자가 현양 주일이던 1224년 9월 14일 새벽,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산에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못박힌 케루빔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다.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며, 다른 성흔 체험자로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카푸친회 소속이었던 오상의 성 비오 신부 등이 있다.[17] 하지만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는 이 때 이탈리아어로 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18].
포르치운쿨라에 온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질 무렵,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동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걸친 옷을 모두 벗겨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 141편을 읊은 뒤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죽음도 '자매'였다.
시편 141편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
제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 사내들과 함께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저들의 진미를 즐기지 않으오리다.
의인이 자애로 저를 때려도 저를 벌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머릿기름, 제 머리가 마다하지 않으오리다. 저들의 악행을 거슬러 저는 늘 기도드립니다.
저들이 심판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제 말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 알리이다.
누가 밭을 갈아 땅을 파헤쳤을 때처럼 저들의 뼈가 저승 어귀에 흩어지리이다.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 제가 당신께 피신합니다. 제 영혼을 쏟아 버리지 마소서.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
제가 탈 없이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다음 날 성 조르조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 후, 1230년 5월 25일 그를 기념하여 지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0월 3일 저녁 오후 해진 뒤에 성 프란치스코가 숨을 거두었는데, 당시의 전례적 기준에 따르면 일몰 뒤라 다음 날로 간주되었으므로 10월 4일을 프란치스코 축일로 정하였다. 지금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전이예식(transitus)라고 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한다.[19] 전이예식이라는 이름은 성 프란치스코가 그날 지상에서 천국으로 전이(옮겨감)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9월 17일을 성 프란치스코 수난상처 축일, 혹은 오상 축일이라고 부르며,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산에서 성흔을 받았음을 기념한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
하느님, 가난하고 겸손한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성자를 따르게 하시고,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주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태양의 노래>는 성인이 눈병을 얻어 치료를 하면서 지은 것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구술한 것을 다른 형제 수사가 받아썼다고 전한다. 원제는 <피조물의 찬가(Laudes Creaturarum)>였는데 후에 성가로 작곡되면서 <태양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경애하는 형제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21]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자매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자매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자매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형제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자매이자 (또한)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자매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민순 사도 요한 신부 역/엔하위키 미러 편집
성인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는 물이나 불까지도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창조 아래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했다는 뜻. 병의 치료를 위해 불에 달군 인두를 몸에 지져야 할 때가 있었는데, 성인이 인두를 달구는 불을 향해(…) "내 사랑하는 불 자매여, 내가 언제 그대를 함부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의 사랑을 기억해서라도 나의 몸에 닿을 때 조금만 뜨겁지 않게 해 주오"라고 말했더니 성인의 몸에 닿았을 때 살이 타고 연기가 나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