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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Jul 07. 2022

뒷산 소로(小路)

산골 일기 세 번째

마을 뒷산은 비록 나지막해도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제법 울창한 산세를 자랑한다. 

오래전 닦아놓은 임도들은 낙엽에 덮이고 풀들에 갉아 먹힌 옛길들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흔적 길이 되었다. 

하지만 부쩍 산행길이 잦아지면서 그 희미한 옛길들은 다시 우리의 산책길이 되어 주었다. 

뒷산 길을 오른 지 두어 달이 되지 않았지만 벌써 흔적 길이 선명해지고 있다. 

듬성한 발자국이라도 걷다 보니 길이 나고 이어지는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참 사람의 발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꽤 높은 등성이까지 치고 올라온 감나무 밭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산길이기는 하지만 전투적으로 마음을 다잡을 만큼 가파르거나 험한 길은 아니다. 

산자락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소박한 마을처럼 적당한 오름세와 내림세를 가진 질박한 길이다. 

볕이 따사로운 개활지에서는 저 멀리 황매산이며 둔철산의 위용 있는 등성이도 보이지만, 

잡목이 빽빽한 길에 들어서면 하늘을 가리고 선 나무들뿐 바람도 잘 들지 않는 길이다.     


이리저리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산길을 가로지르는 동안 사람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간혹 나처럼 산책 나온 마을 어르신들을 한둘 볼까 산에는 언제나 나뿐이다. 

그렇다고 적막한 느낌은 없다. 

숲의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오랜 친구처럼 익숙하고 반가운 마음이다.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무덤들조차 낯설지 않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해서 길섶을 벗어나면 도깨비 풀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길섶 밖에는 통상 도둑 가시 천지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바짓가랑이에 들러붙어 따끔따끔 무임승차를 요구한다. 

그 협박이 지나친 통에 먼 길을 나서지는 못하고 그만 대부분 제자리에 털어내고 만다. 

그래도 간혹 용케 눈을 피한 도둑 가시들은 제법 먼 곳까지 길을 떠나 또 다른 세상 구경을 한다.   

  

인적 없는 숲길을 묵묵히 걷는 것은 몸의 건강은 물론 영혼의 호수를 잔잔하게 한다. 

격랑을 일으켰던 감정의 날 끝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뎌지고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욕심했던 것들을 얻은들 무엇이 더 달라지겠는가? 

못 가져도 그만인 것들에 아등거렸던 날들이 그저 부끄러울 뿐. 

모든 것을 내어 놓으며 비로소 자연이 되고 우람한 키 자람이 되는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조용한 가르침을 듣는다.           


마을에 수복 아저씨라는 분이 계시다. 

그 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아 간혹 만복이 아저씨라 부르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평생을 살다가 십여 년 전 고향마을로 은퇴한 어르신이다. 

이 분이 부지런히 산을 다니면서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 산책로를 닦아 놓으셨다. 

산에 길 내는 것을 취미 삼아 잡목을 자르기도 하고 작은 계단을 만들기도 하고 갈래 길을 내기도 하면서 

아기자기한 길을 내셨다. 

덕분에 뒷산 이곳저곳을 다녀볼 기회가 많아졌다. 

새로 난 길을 걸으며 새로운 풍경을 만난다. 

참 고마운 어른이다. 

그런 분이 계셔서 바라보기만 하던 산이 안길 수 있는 산이 된다. 

나도 그분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산길을 걸을 때마다 길에 덮인 낙엽이라도 걷어내며 길을 가려 애쓴다. 

자연이 얼마나 치열한지 며칠만 뜸해도 길이 듬성듬성 가려지곤 한다. 

발길에 땅이 단단히 다져지기 전까지는 풀들의 열심에 그만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복이 아저씨가 새로 낸 길을 일부러라도 다니며 발길을 다진다. 

그래도 한 겨울 지나고 봄철 발길이 뜸해지면 지워진 길을 다시 찾는 부지런을 떨어야 함은 어쩔 수 없다.      


오늘도 무료하거나 얽힌 일상들을 뒤로하고 산길을 나선다.  

마음에 담긴 익숙한 풍경대로 나무며 들풀이며 구불구불한 숲길이 여전하다. 

바람은 산들하고 햇살은 정겹다. 

 닮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익숙한 숲길을 걸으면 나도 숲길이 되는 것 같다. 

숲을 닮아가듯 마음이 한적해진다. 

무엇을 꼭 해야 하고, 무엇을 꼭 이루어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게 된다. 

한 세상에 태어나 자기 영혼에 깊이 침잠하여 충일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비록 남들이 알아줄만한 업적은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내밀한 기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삶 아닐까!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삶의 싸움터 한 편으로 비켜서서 한 세상 그리저리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들꽃으로 피었다가 들꽃으로 지는...

왜 거기 피었었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곳일지라도

오롯이 제 향기를 내고 살다가 

제 향기에 접히는

한 떨기 들꽃으로 사는 것도 괜찮아. 

      

누가 보아주든 보아주지 않던 길섶에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는 자잘한 꽃들을 보며 

나는 소박한 마음을 배운다. 

도둑 가시같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이름을 내고야 말겠다며 따끔따끔 찔러대던 욕망을 

애써 털어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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