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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Jul 07. 2022

자연의 흥망성쇠

산골 일기 네 번째

도시에서는 몰랐다.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언제나 똑같은 풍경이었다.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쌀쌀했을 뿐, 세월의 영고성쇠가 눈에 띄지 않았다. 

일상은 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나이가 들었고 뒤돌아보면 덧없다는 생각만 가득한 시간이 흘러갔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도 모른 채 

경쟁의 언덕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았다. 

어쩌면 살았다는 표현보다 살아냈다는 표현이 정답일 수도 있겠다. 

그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에서 나 또한 적당한 탐욕과 치기와 속물근성으로 버티며 적당한 존재가 되어갔었다. 남들이 다 그러고 살듯이.   

   

하지만 시골로 들어와 살면서 삶이 생생한 드라마가 되었다. 

우리가 시골에 들어왔을 때가 9월이었다 

늦여름이 막 지나고 초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은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던 감나무에는 탐스런 열매가 셀 수도 없이 맺혀 있었다. 

10월에 들어서서는 무르익은 과실로 언덕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풍요로운 풍경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언덕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12월 그해 유난히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 

풍요가 넘실대던 언덕에는 과일을 모두 따낸 가지에 잎새마저 하나 둘 지기 시작하면서 

앙상한 가지의 감나무들이 을씨년스러웠다. 

언덕을 가득 메웠던 풍요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헐벗은 감나무들이 갈색 대지위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스산하게 서있었다. 

3월이 오기까지. 그렇게 세월을 견딘 감나무 언덕에 봄이 왔다. 

푸른 새순이 돋고 집안 뜨락에 심어둔 해당화며 산수유, 동백은 물론 

갖가지 풀꽃들이 일제히 형형색색 꽃들을 피워냈다. 

만물은 죽음을 넘어 다시 부활했다. 

5월 벌써 시작된 여름의 열기에 이팝나무가 흐드러지면서 먼 산에는 이른 녹음이 짙어갔다. 

여름은 절대 지워질 것 같지 않은 푸른 물감으로 온 세상을 색칠하기 바빴다.      


도시에서는 몰랐는데 시골에서는 자연의 흥망성쇠가 생생한 풍경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세월의 풍경이 극명하게 바뀌는 것을 매일매일 피부로 느낀다. 

 나는 그 속에서 자연이 던져주는 삶의 성찰을 깨닫는다. 

절대 잃어버릴 것 같지 않은 풍요도 나뭇잎 하나 남김없이 다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음을 

가을과 겨울이 보여 주었다. 

텅 빈 가지에 기적같이 새순이 돋아 다시 회복되는 3월이면 

그 어떤 절망도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긴다. 

자연은 흥하고 쇠하는 순간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가졌다고 자만하거나, 부족하다고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쳐주었다. 

명심보감의 한 구절 ’ 만사분 이정(萬事分已定), 부생 공자 망(浮生空自忙)‘이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깨달아진다. 

봄이 되면 재촉하지 않아도 잎새가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절로 푸르러지고, 

가을이면 만물이 영글고, 겨울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긴 날들을 견뎌내야 한다.  

계절의 극명한 변화와 만물의 득실은 어떻게 세월을 살아내야 하는지 내게 생생한 그림을 그려준다.  

    

나는 그 안에서 가장 먼저 덧없는 탐욕을 내려놓는 훈련을 한다. 

천지를 가득 채운 열매도 한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언덕 위에서 

나는 조금 더 누리고 가지려 애썼던 것들이 내 노력만큼 길게 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록 길게 남겨진다 하여도 영원한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두고 가고 털어내고 떠나야 할 것들이다. 

시골 살이로 가을과 겨울을 지내면서 나는 내 몫을 챙기려고 경쟁하며 달음질치던 

본능적 습관을 내려놓으려 무던 애를 써본다.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려 한다. 

죽은 것 같던 나무들이 다시 푸르게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세월이 가면 그 어떤 풍경도 변화하게 마련인 것을 깨닫는다. 

성급하지 않으면 시간은 반드시 상황을 반전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비록 웅크림이 길어질지라도 봄의 기운은 반드시 와닿을 것이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처럼 

나는 눈앞의 상황보다 변화될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을 품는다.    

 

눈앞을 생생하게 지나가는 사계의 변화가 내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내게 부딪는 일상의 희로애락이나 이해타산에 덤덤해지는 평상심이다. 

넘침이나 결핍에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으며 

특별히 손익의 문제에 담담하려 한다.         

 

지금 산길 어름에는 막 이팝나무 꽃이 돋기 시작했다. 

벌써 흐드러지게 핀 나무들도 눈에 띈다. 

이팝나무 꽃이 피고 있다는 것은 이제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자연의 신호다. 

계절은 바야흐로 더없이 푸른 생명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허기진 땅 위로 백설기 같은 꽃잎을 날리는 이팝나무는

 ’ 그래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다시 풍요의 시간이 돌아올 거야 ‘라는 

약속의 전령처럼 흰 손을 흔들고 있다.       


- 이팝나무 꽃 -     


봄이 떠나는 길 끝에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소복한 흰 밥을 닮은 

배고픈 꽃     

녹음만 짙어가는 들녘에

백설기 부스러기 같은 꽃잎이 흩날린다.     

밥 짓는 연기 그리운

산골 토담 가     

흰 구름, 흰 꽃, 흰 밥알이

허기진 땅 위로 점점이 떨어진다.     


나는 풍요의 메신저 이팝나무에게 작은 시 한 편을 선물해 본다. 

아직 겨울이 먼 만큼 이 시간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즐겨야겠다. 

다시 겨울이 와서 마음이 스산해진다 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햇살 가득한 추억으로 내 시간을 물들여야겠다. 누리지 못하고 유보된 시간은 결코 내 삶의 시간이 아니다. 

희랍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했듯이 관념의 삶은 실제의 삶이 아닌 것이다. 

인생은 그 시절, 시절을 역동감 있게 누리고 즐기는 것이다. 

바야흐로 녹음의 계절이다. 야호~          

(갈무리해두었던 글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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