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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02. 2022

고양이 밥 주는 아내

산골 일기 열세 번째

“켓맘이라카던가? 뭐 요상한 이름으로 고양이 밥이나 주는 일 하지 말그레이. 

고양이들한테 밥 줘갖고 온 동네가 도둑고양이 천지 아이가?”


오랜만에 방문한 시골 지인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에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이유는 우리 집에서 아침을 해결하는 들 고양이가 세 마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기 시작한 것은 지난겨울 무렵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무슨 우호적인 낌새라도 눈치챘는지 뜰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 들었다. 

녀석은 몹시 배고픈 표정으로 희미한 울음소리로 야옹거렸고 그 소리가 아내의 측은지심을 건드렸다. 

마침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의 사료가 남아있던 터라 아내는 사료를 조금 내어 고양이에게 주었고, 

그 뒤로 녀석은 그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어디에 소문이라도 냈는지 또 다른 고양이를 두 마리나 대동한 채.    

   

집 뜨락에 고양이가 출몰하면서 이웃들의 눈치는 조금 예민해졌다. 

뻔히 알면서 “요즘 누가 밥을 주나 봐. 고양이들이 부쩍 눈에 띄는 게...” 하며 은근한 압박을 넣는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고양이 밥을 주면 야생성을 잃어버려 고양이에게 오히려 안 좋아요.” 하며 

합리적인 이유를 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아내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둘까 싶었을 때 공교롭게 그중 한 마리가 임신을 했는지 불룩한 배를 끌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새끼를 가진 어미를 박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이유가 있긴 했지만 간혹 아내 대신 밥을 주는 내 기분이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산골이라 그런지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고양이들에게 

아무리 밥을 줘도 살갑게 다가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때가 되면 마치 맡겨놓은 자기 권리라도 주장하듯 세 녀석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사료를 재촉한다. 

한 녀석은 유난히 성질이 사나워 사료를 주러 가는 동안에도 으르렁 거리며 하악질을 해댄다. 

또 다른 녀석은 사료를 주는 그 순간을 참지 못하여 발로 손을 할퀴는 바람에 손에 상처가 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 버릇없는 녀석들에게 사료를 계속 줘야 하나 라는 갈등이 매번 일지만 

그래도 한번 든 습관에 어쩔 수 없이 사료를 주게 된다. 

그런데 간혹 사료를 그만 끊고 싶을 만큼 갈등이 증폭되는 순간이 있다. 

녀석들이 어찌어찌 잡아온 새나 쥐를 잡아먹고 그 사체를 데크에 놓아둘 때이다. 

지들 딴에는 밥값 한다는 의미인지 내 아는 지인은 뱀을 잡아다 현관 앞에 두기도 해서 

기겁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며칠 전 아침에도 조그만 쥐의 사체를 치우면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뭐 그리 살갑게 굴지도 않고, 혐오스럽게 데크나 어지럽히는 녀석들을 굳이 챙겨야 하나? 

이웃들의 눈총까지 받아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평소와 다르게 오후에 고양이 밥을 한 번 더 줄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아침에 사나운 개울음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동네 뒷산을 떼 지어 다니던 유기견들이 

집 마당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녀석들은 무슨 심기가 상했는지 우리 집 뜨락에서 아침을 기다리던 고양이들을 무참히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도록 고양이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큰 상처라도 입었을까 걱정이 되어 한참 동안 창가를 서성이는데 

오후가 되어서야 한 녀석씩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딱 봐도 쫄쫄 굶은 얼굴 표정이 역력했다. 

야생의 세계에서 힘에 밀린 녀석들을 생각하니 약육강식의 정글을 살아내느라 힘겨웠을 

녀석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녀석들이 처한 자연의 냉혹함을 알고 나니 밥 한 끼라도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한참이나 지난 오후지만 늦은 밥을 내주었다. 


세 마리니까 서로 싸우지 말라고 밥도 세 무더기로 나눠준다. 

그나마 기특한 것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제 것 다 먹고 남의 것 탐하는 녀석은 없었다. 

심지어는 조금 늦게 온 녀석의 입을 위해 자기 것을 다 먹고도 남겨 두는 모습을 보곤 한다. 

말없는 녀석들의 우애가 느껴진다. 

그럴 때면 본인이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과욕의 인간보다 

미물에 불과한 고양이가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짐승만도 못한 놈’이란 욕이 가장 지독하면서도 현실적인 욕설이 아닐까 싶다.   


그제부터 임신했던 녀석의 배가 홀쭉해 보인다. 

어디서 새끼를 풀었는지 알 수 없지만 녀석이 부쩍 앙칼지다. 

새끼들 젖을 물려야 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한지... 

고양이 밥 주는 일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다시 또 하나 늘었다. 

임신했으니, 젖을 물려야 하니 먹을 것을 줘야 하는 것처럼 

아마 이후에도 새로운 이유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다. 

측은지심이라는 것이 그렇다. 

무슨 똑 부러진 이유나 인과적 근거 따위 아무 의미가 없다. 

마냥 좋기만 한 사랑에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 다른 이유도 없다. 

내일 또 어떤 동물의 사체를 치워야 할지, 더럽혀진 데크를 청소해야 할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녀석들에게 어쩌면 일정 시간 아침이 보장되는 루틴이 야생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루틴이 주는 안정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오래도록 맛보고 살아온 내 입장에서 그런 생각이 든다. 

야생의 특성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매 순간 다른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야생 속에서 내일 보장된 아침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고양이들에게 작은 행복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아내는 고양이들의 아침을 챙긴다. 

야생성을 잃을까 저어되어 차마 저녁까지는 챙겨주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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