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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Aug 03. 2022

시든 금송

산골 일기 열네 번째

한 여름 무더위가 십여 일째 기승을 부리더니 지난가을 현관 옆에 심었던 금송 두 그루가 

약속이나 한 듯 마르기 시작했다. 

축 쳐진 잎새가 안타까워 정성 들여 물을 주고 잔가지도 손질해 주었지만 

이미 번지기 시작한 갈빛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잠식해 갔다. 

마치 시한부 날짜가 정해져 백약이 무효한 환자처럼 메말라가는 나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팠다. 

비슷한 조건으로 함께 심었던 옆집의 나무들은 모두 청청한데 

우리 집 나무만 쇠잔해가는 것에 더욱 속상했다. 

도대체 무엇이 싱싱하던 나무들을 병들게 한 것일까?    

 

그렇게 며칠을 전전긍긍하던 차에 나무는 완전히 말라버렸다. 

아내는 고사한 나무를 바라보며 심긴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표하던 불만이 

스트레스로 전달된 것은 아니었을까? 후회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무가 스스로의 생명을 놓을 만큼 무언가 불편했다는 사실이다. 

고사한 금송 옆에 심은 황금송과 대추나무, 회화나무는 모두 싱싱한 것을 보면 

금송에게만 견딜 수 없었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못내 궁금했다.      


나무와 꽃을 가꿔보니 햇살부터 바람, 물, 토양, 비료 하나까지 생존의 조건이 서로 다른 것을 깨닫게 된다. 

비슷해 보이는 뿌리와 줄기와 잎새를 가졌어도 혹독한 자연을 견뎌내는 힘이 

서로 다르고 필요로 하는 자원의 양도 다르다. 

무조건 물과 비료를 듬뿍 준다고 해서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집에서 죽어 나가는 수많은 관상용 나무와 꽃들은 역설적으로 너무 사랑이 과해서인 경우가 많다. 

물을 과다하게 주어 뿌리가 썩은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식물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을 키우지 못하면 

 풍요로운 환경일지라도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나무를 새로운 토양이나 환경 속에 식재할 때는 가혹하다 싶을 만큼 가지치기를 한다. 

그 이유는 수세(樹勢)가 약한 상태에서 양분의 낭비를 막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무가 오로지 생존에만 힘을 쏟아 내성을 갖게 하고자 함이다.      


시들어 버린 금송을 바라보며 나는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느껴본다. 

키우는 식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좋아 보이는 것을 듬뿍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에 맞는 토양과 빛, 물과 양분을 적절히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 적당함이 식물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고 사랑이다. 

그 적당함의 조화가 깨지면 식물도 무너지게 된다. 

무릇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 

상대방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베풀고 강요하는 것, 

과도한 집착들이 사랑을 망가뜨리지 않는가! 

무엇이든 과하지 않은 적절함, 은은함이 오래도록 타오르는 불꽃이 된다. 

지난 일들을 가만 돌이켜보면 지나친 뜨거움과 불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이 

시든 금송처럼 내 곁을 스쳐 스러지고 말았던가! 

이내 훌훌 타서 재가 되어버린 나무처럼 내 삶의 뒤 안엔 사랑의 과욕으로 남겨진 폐허들이 얼마나 많은지. 

풋풋한 싱그러움으로 넘쳤던 관계들이 이제는 오히려 단절의 편린들로 남겨진 일들이 가슴 아프다. 

사랑은 어쩌면 내 안에 머문 감정이 아니라, 그대 안에 담긴 자유로움이 아닐까? 

그대에게 가장 알맞은 햇살이며 물줄기며 바람이 되는 것. 

그대에게 가장 편안한 간격과 위치에 서는 것. 

사랑은 아마도 틈새 없는 밀착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유로운 간격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고도의 기술이다. 

사랑하는 그대가 느끼는 가장 편안한 거리에 서있는 것, 

그 사랑의 거리를 헤아리는 배려와 존중이 사랑의 본질이란 생각이 든다.   

   

금송은 뜨락에서 영문 모르게 시들어갔지만 화병에 담긴 꽃들은 예견한 대로 시들어간다. 

처음부터 적당한 때에 갈아줄 생각이었지만 식탁 위에서 짧디 짧은 아름다움을 끝으로 시드는 꽃들이 

금송의 마른 모습과 중첩되었다. 

나의 작은 욕심에 강제로 집 안에 불려 들어와 시드는 들꽃들을 보자니 

갑자기 사랑의 무자비한 폭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보다가 꽃다웠던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는 늙어 가는 그 모습에 가슴 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 다시는 꽃송이를 꺾어 화병에 담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뜨락에 흐드러진 꽃 몇 송이를 

작은 화병에 담았다.

몇 걸음 풀밭 너머

한 줌의 하늘을 지나

보편의 경계를 건너

내 사랑을 마주한 꽃은

잃어버린 뿌리를 잊었을까 싶지만

마침내 시들어 가는

그 영원이 머무는 화병 위에

나 또한 세월을 지나

그리움 겨운 햇살과 그늘을 건너

여기 책상에 뿌리를 꺾고 앉아

그대와 함께 화병에 담긴다. 

내가 그대를 보듯

그대 안에 담긴 나를 보내며

사랑이란 내가 아니라

그대 안에 담길 때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아! 이제야 알겠구나!     


나는 제목도 붙이기 애매한 시구를 만지작거린다. 

금송의 잔해를 치우며 나는 함께 늙어가는 아내를 생각한다.   

   

여보! 평생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당신을 속박했구려. 미안하고 미안하구려. 

이제 남은 날들은 애써 나로 인해 오히려 그대 안에 자유로움, 여유, 평안함이 가득했으면 좋겠소. 

나는 그대가 인식할 수 있는 거리 밖에서 든든한 울타리처럼 서 있으리다.     


아~ 사랑이 어렵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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