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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19. 2022

곡예사의 그물망

산골 일기 삼십육 번째

    

나이 들어갈수록 세상이 좁아진다. 생각도 좁아지고 시야도 좁아지고 행동반경도 좁아지고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도 좁아진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체력과 영향력의 범위가 줄어드는 만큼 삶의 영역이 축소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젊었을 때는 미식을 찾아 한두 시간 운전하는 일이 예사였지만 나이 들고 나니 ‘먹는 게 거기서 거긴데 그 먼데까지 뭐 하러...’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힘들거나 버거울 수 있다는 체력적 한계가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감정의 변화도 그 진폭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특별히 재미난 일도, 특별히 열망하는 일도, 특별히 눈물 나는 일도 없다. 아니 그런 일들이 천지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무던해진 것일 테다. 굽이치는 격랑 하나 없이 흐르는 조용한 강물처럼 그렇게 세월이 무덤덤하게 흘러간다.      


그런 물끄럼한 마음이 된 것은,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것으로 호들갑을 떨곤 했던 젊은 날의 경박한 기억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세월의 경험 속에 그깟 일쯤이야 하는 마음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이가 들어가니 좋게 말하면 진중해졌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 무기력해졌다. 그 무기력함 

속에 세상은 점점 더 좁아져 간다. 만나는 사람의 한계도 해가 다르게 줄어들어 연락두절이 되어가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그러다 보니 좁아진 세상의 틀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도들이 오히려 무시무시한 찻잔 속의 태풍이 되곤 한다. 백 사람 중 두세 사람의 문제는 무시해도 그만일 테지만, 대여섯 명의 인간관계 속에서 두세 사람이면 인간관계의 절반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좁아진 세상에서 인간관계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더욱 소중하다. 

어린 왕자의 장미 한 송이처럼 내 뜨락에 옮겨놓은 작은 돌멩이 하나, 꽃 하나가 특별하듯이.      


인간관계의 교류가 치열했던 젊은 날의 수많은 인간군상은 관계 다이어트를 통해 정리해도 그만이지만 나이 들어 맺은 인연의 사람은 적은 만큼 소중한 존재다. 좁아진 관계의 폭으로 봐도 그렇지만, 모든 이해관계가 

끝난 상태에서 만난 인연이니 더욱 그렇다! 이런저런 풍상을 겪으며 터득한 안목의 시험대를 통과한 특별한 인연이니 얼마나 더 소중한가? 나이 들어 완고해진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인연이니 얼마나 더 귀한가 말이다.      


그러므로 나이 들어가면서 그 소중한 인연을 지켜나가는 일은 중요한 가치가 된다. 인생에 더 바랄 것도 기댈 것도 없는 시간에 찾아온 인연마저 놓쳐버린다면 노년의 깊은 고독과 쓸쓸함을 홀로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사람 인(人) 자가 서로 기대어 있는 두 개의 막대인 것을 보면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주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버티어 내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이 들어서는 서로 기댈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말이다.      


그래서 소중한 인연을 지켜나가기 위한 좋은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상대방이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안도의 존재가 되어주는 것일 테다. 마치 곡예사들 밑에 쳐져 있는 안전한 그물망 같은.     

 

”곡예사의 그물망은 떨어지라고 쳐진 것이 아닙니다. 떨어져도 괜찮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곡예사들이 두려움 없이 마음껏 곡예를 펼칠 수 있는 것은 밑에 쳐진 그물에 대한 신뢰감, 안심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와 같지 않을까?


”실수해도 괜찮아! “ 

”때로는 떨어져도 괜찮아 내가 있잖아! “ 

”나를 믿고 하던 대로 해봐! “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곡예사의 그물망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연약함을 말없이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이 들어가면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완고해지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 비슷하게 생각하고 판단했던 생각의 습관이 기준이 되어서 그에 반하는 것들을 용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오죽하면 ‘남자 나이 오십이 넘으면 죽었다 깨나도 안 바뀌어!’라는 말이 회자되겠는가!      


나는 나이 들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청년의 가슴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십갑자를 지나고 나면 새로운 한 살이나 다름없으니 인간의 평균수명에 육십을 빼고 나면 우리는 대부분 이삼십 대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셈이 아닌가? 그러니 노년의 삶이란 역설적으로 청년의 나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청년의 특징은 경험 부족으로 인한 잦은 실수 때문에 생각과 태도를 가볍게 바꿀 수 있다는데 장점이 있다. 그래서 완고한 청년을 만나기가 흔치 않은 것이다. 나이 들면 오히려 살아온 경험치가 전부인 세상에 갇힐 수 있으니 어쩌면 청년의 좌충우돌보다 더 큰 실수투성이가 될 수 있다. 좁아진 판단의 한계로 인해 점점 더 완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세계에 갇히고 나면 ‘나 때는 말이야!”를 연발하는 대책 없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은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누군가의 그물망이 되어 주는 것이다. 때로는 노년의 너그러움으로 가득한 정서적인 그물망, 때로는 육십갑자 동안 배우고 익힌 경험으로 조언하는 따뜻한 그물망, 때로는 묵묵히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위로의 그물망... 내가 앞장서고 내가 나서서 주인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 내려서서 조용한 박수를 보내주는 마음이 노년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왜 조금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꽃다운 청춘을 다하고 이제는 주름지며 나이 들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늘 내 기준을 강요하며 감정적 위로를 전해주지 못했던 날들을 

후회한다.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와 넉넉함을 주는 것임을 인생의 가을에 이르러서야 

깨닫는다. 비록 보이지 않는 먼 곳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안심할 수 있는 조용한 그물이 되어 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디 사랑하는 아내뿐이랴? 나이 들어 만나게 되는 새로운 관계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깊은 안도감과 안정감을 주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올 가을이 저물기 전에 여전히 상석을 바라고, 앞자리를 바라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노추(老醜)를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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