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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21. 2022

아버지. 나의 아버지

산골 일기 삼십팔 번째

   마음이 세상사로 한껏 부대끼고 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랜 세월을 떨어져 살아 큰 정이 없던 아버지였지만 햇살 아래 발 디딤 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소식은 철퇴처럼 무겁게 내 마음을 내리쳤다. 아~ 아버지. 내 기억 속에 남겨진 아버지의 일생은 평범한 소시민의 걸음 그 이상도 아하도 아니었다. 한편 생각하면 일생도록 고단한 인생이었다. 남들이 알아줄만한 업적은 없었지만 단 한 번도 삶의 분투를 내려놓은 적 없는 삶이었다.     

 

앙상한 몸에 삶의 기력을 다한 아버지는 깊은 혼수상태에 계셨다. 의사는 그 혼수상태를 끝으로 이 땅에서의 아버지의 분투도 끝날 것이라 말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가슴  절절함이 마음을 짓눌러온다. 내겐 그리 

살가웠던 아버지도 아니었는데...     

  

- 위독하시다는 아버지의 소식 -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아

그리움마저 먼 아버지였습니다.      

애써 담담히 이별과 마주한 어머니는

“먼 정이 남았다고 이리 눈물이 난다냐?” 하시며 

차오르는 설움에 겨워하셨지만

삶의 온기가 사라진 아버지의 얼굴은 생경스러웠습니다.     


내 유년의 세월 너머에는 

혈기로 집안을 들부수던 아버지의 흔적들이 옹이로 남아

그를 위한 눈물이 내게 남아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의 햇살 아래

발 디딤이 겨우 며칠뿐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곤두박질칩니다.    

  

미음 한 모금도 힘겨운 미망의 침상에서

아버지의 영혼은 지금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보고 계실까요?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계실까요?      

나는 그 이별 앞에

오래 버려두었던 녹슨 자물쇠를 풀고

앙상한 육신에 매달린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을 안아봅니다.     


이별의 고단함보다는 

본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에 뒤척이는

오직 한 소망을 눈물 가득 가슴에 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의 며칠 같은 이 땅의 나그네 걸음이 모두 끝나면

그때 다시 하늘의 나라에서 만납시다. “     


나는 애써 아버지를 향한 헌시를 드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아버지의 부재를 생각하니 그 수많았던 세월 속에 몇 가지 기억만이 오롯하게 남는다. 초등학교 2~3학년 시절 방직공장에 다니시던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동구 밖으로 나가면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과자 봉지를 한 아름 안고 내게 다가오시곤 했었다. 

과자 봉지를 든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던지!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또 하나의 기억은 시골에서 단봇짐을 싸서 이고 지고 서울로 올라온 첫날 저녁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리 잡은 서울 변두리에서의 첫 집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허름한 누옥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땔 여유조차 없었던 그날 저녁에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장면을 사주셨다. 자장면은 시골에 살면서 말로만 듣던 전설의 음식이었다. 그날 나와 동생들은 입가를 새까맣게 묻혀 가면서 맛의 천국을 경험했었다.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던 서울은 그렇게 자장면과 함께 맛있는 기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나는 나중에 그 자장면 값이 서울에 도착한 아버지 호주머니에 남아있던 유일한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까짓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은 즐겁게 자장면을 먹자 ‘던 아버지의 배짱이 얼마나 든든했던지. 

아버지의 그 낙천(樂天)은 내 성장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 아버지를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사춘기 시절 내 시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가려진 아버지의 사랑이 지금 가녀린 향기로 남아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평생을 부유하거나 명예롭거나 어떤 권한도 가지지 못했지만 삶의 치열한 분투를 놓치지 않았던 아버지를 

추억한다. 마음에 맺혔던 모든 매듭의 끄나풀을 풀어내 버린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또 하나의 파도가 나를 

또 얼마나 부수어낼까? 그 파도와 파도를 맞으며 나는 또 얼마나 곱게 갈아질까? 

아는 지인 한 분이 이십여 년 간격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소 앞에서 누가 더 장수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똑같이 백골이 되어 누워있는 묘소 앞에서 우리 모두가 꿈꾸는 무병장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짧은 생애를 살아도 가치 있게 사는 것이 귀하지 않은가! 

나는 그런 상념에 젖어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을 준비했다.      


 아버지 부디 잘 가세요. 내 남은 여정도 비록 빛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분투에 가득한 날들로 살아갈게요. 그냥 썩어서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는 삶이 되기를 응원해 주세요. 


일 년 전에 쓴 글이다.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소천하셨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얼굴로 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시고, 자는 듯 조용히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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