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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Sep 24. 2022

바이든? 날리면?

산골 일기 사십 번째

글로벌 펀드 7차 재정 공약 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이 회의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한 말이 국격의 문제로 비화되면서 나라를 온통 시끄럽게 하고 있다. 세계적 유행의 질병을 통제하고 저개발 국가를 돕고자 만들어진 펀드에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60억 달러를 약속했고 우리나라도 1억 달러의 펀드를 약속했다. 그런데 회의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대통령이 한 말이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언론사의 합동 취재로 드러난 대통령의 말은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대한 정치 평론가들의 한결같은 해석은 ’ 미 의회가 바이든의 공약을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창피해서 어떡하냐?‘라는 의미라 했다.     


그런데 다음날 여당의 논평은 언론의 보도와 사뭇 달랐다. 대통령이 진짜 한 말은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라는 것이라 했다. 바이든이라는 단어는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앞서 발언한 ’XX‘도 미 의회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야당을 지칭하는 말이라 했다. 누구 말이 맞든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 진흙탕 싸움에 예기치 않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 마음이 참담하고 창피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속어를 쓴 대통령도 문제지만 무조건적인 내편 문화와 확정 편향의 심각한 오류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해당 발언이 누군가에게는 천 번을 들어도 ’ 바이든‘으로 들리고 누군가에게는 듣고 또 들어도 ’ 날리면 ‘으로 들린다는 사실이다. 이를 입증하고자 한 방송사에서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자는 취지로 같은 발언을 ’ 바이든‘이라는 자막을 넣어서 들어 보고, 또 한 번은 ’ 날리면 ‘이라는 자막을 넣어 듣는 실험을 했다. 당연히 자막을 바이든이라 워딩 하고 들으니 또렷하게 ’ 바이든‘이라 들렸다. 그런데 자막을 ’ 날리면 ‘으로 워딩 하고 들으니 얼핏 ’ 날리면 ‘이라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때로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리게 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이게 하는 왜곡을 가지고 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내게 화가 나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시작하면 그가 내게 화난 증거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평상시 같은 말도 퉁명스럽게 말한 듯하고, 같은 억양도 격앙되게 들리게 된다. 반면 ’저 사람은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어 ‘ 그렇게 믿고 들으면 대화 곳곳에서 우호적인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의미 없는 미소도 호감의 표현이 되고, 습관적인 눈빛 하나에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마찬가지로  ’ 날리면’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바이든’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대통령은 오류가 없다는 믿음을 절대 불가침으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천 번을 들어도 ‘날리면’으로 들릴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더 큰 문제는 이어진 ‘XX’라는 표현에 대한 여당의 해석이다. 이 해석은 강대국에게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을 자국으로 돌리고자 하는 치졸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런 여당의 태도가 나는 참 어리둥절하고 이상하다. 차라리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사과 한마디면 될 것을 그들은 왜 그토록 집요한 억지논리를 펼치는 것일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말이다.   

  

소위 ‘내편 문화’가 나라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중심이 되어서 보편적인 양심에 기초하여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작금의 현실은 내편이냐? 아니냐? 가 판단의 중심이 되고 있다. 내편이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무조건 옹호하고 보는 편향의 왜곡이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한 개인은 물론 나라가 바로 서려면 비록 내편일지라도 그릇된 것은 그릇되다 말하고 비록 불이익이 오더라도 응분의 대가로 치를 줄 알아야 한다. 판단의 잣대가 ‘내편’이 아닐 수 있는 올곧은 생각과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바이든’ ‘날리면’ 논란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내게는 그런 편향과 왜곡이 전혀 없는 것일까? 아니 전혀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차원에서 나는 해마다 7월 20일 열리는 독일의 신병 선서식이 부럽다.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 20일은 히틀러의 광기에 대항하여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그를 암살하려 했던 날이다. 독일은 바로 그날을 신병 선서식 날짜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이 국군 통수권자를 제거하고자 했던 하극상의 치욕적인 날을 신병 선서식 날로 정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에서였다. 언젠가 독일의 국방부 차관이 밝힌 바에 의하면 독일은 군인들에게 진정한 군인정신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복종하는 것이다라는 정신을 심어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인류사 비극의 원인이 히틀러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우리 사회가 이런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 내편, 네 편을 떠나 정의롭고 올바른 것에 동의하고 그릇된 것을 비판할 줄 아는 덕목이 살아나야 세상이 변화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억울하거나 가슴 답답한 일이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누구를 손가락질하랴! 지나온 인간관계를 되짚어 보면 내게도 많은 확증편향적 편견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속으로 되 뇌일 수밖에 없었던 비굴함이 삶의 흔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내편이어서 눈 감아 버린 일들, 입지의 두려움 때문에 꼭 해야만 했던 말을 침묵했던 일들, 명백한 현실 앞에서도 머뭇거리던 일들이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아~ 내 인생에 다시는 ‘바이든’을 ‘날리면’으로 해석하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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